김용택*

나는 집으로 간다 - 김용택

효림♡ 2011. 4. 7. 09:31

* 나는 집으로 간다 - 김용택

 

  나는 집으로 간다 집을 향하기 전에 2학년 1반 교실 유리창을 다 닫고 그 너머로 강변 마른 풀밭 풀잎 위에 남은 햇살들을 본다.

  앞산 마을 뒤에 파랗게 남은 배추밭에 배추, 배추밭가에 한무더기 밤나무 숲에 지금 단풍이 한창이다. 마른 밤나무 잎에 불이 붙으면 불붙은 밤나무 잎은 불타며 날아가다가 불이 꺼지면 재가 되어 하얗게 떨어진다. 불꽃이 늦게 사그라지며 희게 드러났다 사라지던 잎맥, 까만, 가벼운 재.

  지금 긴 복도를 지나 강변에 나가면 강변 억새들이 석양 속에 손짓같이, 고갯짓같이 하얗게 뜰까?  아, 목이 안 보이는 눈부신 억새,  

  나는 지금 집으로 간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씽씽 잘들도 달린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아침에 올 때 강물에 둥둥 떠 있던 오리, 빨간 발을 허공에 내저으며 자맥질을 하던 오리 없다. 틀림없이 누군가 총질을 했을 것이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물이 하늘과 바람과 어울려 노는 꼴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들판은 텅 비어 있다.

  마른 짚들이 묶여 서 있다. 들 건너 마을 뒤안에 감잎 하나 없는 감들이 붉다 산그늘 속에 굴뚝에서 천천히 가만가만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디만큼 오르다 풀어지는 저녁 연기가 평화다. 사람들은 싸움을, 전쟁을 막아놓고 평화라 하지만 저것이 평화다.

  나는 집으로 간다. 

  5분도 안 걷는 아스팔트 길이 나는 싫다. 길가에 흙과 잔자갈들을 밟과 나는 간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아스팔트 길은 딱딱하다. 봄철이면 개구리, 뱀들이 으깨지곤 하는 저 길, 이따금 족제비가 치여 깔려서 털도 없어지는 저 길 흙은 폭삭폭삭하다. 서로 받아들이는 걸까 이해하는 걸까. 얼른 찻길에서 내려 작은 밭가를 돌아 작은 시냇가 징검다리를 건넌다. 풀들이 자라 징검다리도 묻히겠다. 이렇게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다니, 아침 서리고 녹지 않고 이슬도 털리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턴다. 내 발등에 떨어지는 흰 서리, 내 옷깃을 적시는 찬 이슬, 나는 작은 풀잎들을 헤치며 흙을 찾아 발을 들여놓는다. 징검다리 가운데쯤에 서서 돌다리를 돌아가는 물을 바라본다. 바뻐 보인다. 고개를 들어 서쪽을 본다. 산등성에 햇살이 환하게 비낀다. 억새들이 목 없이 하얗게 공중에 뜬다. 금빛이다. 어지럽다. 다시 물 속을 본다. 납자리들이 후딱후딱 돌 속에, 풀 속에 숨는다. 돌고기는 작은 밑에 숨는다. 하늘하늘 까만 꼬리가 보인다.

  징검다리,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건너는 이 징검다리, 이른 봄, 늦은 가을 물이 불어 징검돌들이 물에 잠기면 오리발같이 빨개진 발을 동동 구르며 건넜었지. 어찌나 발이 시리던지 왼발로 오른발 발등을 덮으면 뜨끔뜨끔 후끈후끈 했었지. 얼얼하던 발가락 열개, 발톱 속에 까만 때, 어쩔 때 징검돌 위에 작은 돌로 물을 막고 건너뛰기도 하고 한쪽 발만 신고 양말을 벗고 깨금발로 건너뛸 때도 있었지. 쭉 미끄러져서 털버덕 시린 물에 빠져서 다 젖은 옷과 책보 때문에 집으로 갈까, 학교로 갈까 울던 때도 있었지. 벗어 든 신을 푸른 물에 떠내려보내고 징검돌 위에 서서 엉엉 울던 이웃집 아이의 모습이 저 물에 어린다. 한겨울 징검돌 위에 얼음이 얼면 모래를 한줌씩 뿌리고 엉금엉금 기어 건넜지. 동생을 업고 건너기도 하던 이 징검다리를 나는 오늘도 건넌다.

   나는 집으로 간다.

   어디로 갈까 들판을 질러갈까, 길이 없는 강변으로 갈까. 농촌에 논이 없으면 길이 없고 논이 묵으면 길도 묵는다. 길이 없다. 아무데도 길이 없어 모두 길이 된다.

  강물까지 간다. 언덕을 올라 뒤돌아다보면 억새들이 하얗게 깔려 있다. 바람이 불면 일제히 쓰러지지만, 무엇에 놀란 듯 얼른 일어나는 놈도 있다.

 

강물에 가네

나는 강물에 가네

저문 강물 저물어 나도 가네

강가에 가서

강물을 보네

강물을 보네

아, 이 고요로움을 한웅큼 길어

사랑하는 님에게 드리고 싶네

서편에 뜬 붉은 구름이랑 같이 드리고 싶다네

내 깊은 데서 아직도 타는 이 그리움, 이 사랑을

아, 산봉우리 젖네

저 푸른 솔잎

가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좋다네

물에는 물만 있네

 

  나는 땅을 딛고 흙을 밟고 집으로 간다. 동네는 해가 일찍 진다. 이쪽 산꼭대기에서 저쪽 산꼭대기까지 성큼 뛰어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이에 강이 있다. 그 사이에 집이 있다. 그 사이에 논도 밭도 감나무도 있다. 그 사이에 어머니도 배추밭도 있다. 민세, 민해, 아내랑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아내는 맨날 웃는다. 빨래를 하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엉거주춤 일어서며 찍지 마, 찍지 마 웃는다ㅡ그 사진 그때가 생각난다. 내 몸엔 온갖 풀씨들이 다 달라붙어 있다. 아내랑 시골에 살 때도 난 저물녘이면 참지 못하고 강변을 쏘다니며 풀씨들을 붙여왔다. 아내는 벗어놓은 내 옷에서 풀씨를 떼어 모으며 잔소리를 했다. 오늘 나는 길가에 앉아 한참을 떼어낸다. 여기저기 달라붙은 온갖 풀씨, 이 풀씨들이 이 자리 여기에 파란 싹을 틔울까? 그러겠지. 저녁놀이 서쪽 하늘에 빨갛다. 붉은 구름 한조각이 가만히, 그냥 가만히 있다. 가을엔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쓸쓸하다.

  나는 집으로 간다.

  호박을 짊어지고 다리를 건너 마을로 오는 사람이 있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쓴 할머니도 오고 있다. 지게 바작 위에 푸른 호박 누런 호박, 올해 동네 앞 느티나무는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황금색은 똥색이지. 해 다 진 한수형님네 집에서 "이런 니기미 싸팔"이란 욕이 튀어나온다. 마을에 다 다다랐다. 마을 제일 첫집이 한수형님네 집이다.

  전주에서 집에 와 나는 며칠 동안 잠만 잤다. 연속극을 보다가도 자고 뉴스를 듣다가도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4시나 5시였다. 밖에 나가보면 세계는 고요했다. 안개가 강물처럼 길게 강 위에 피어 있곤 했다.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마당을 지나 빈 논에 오줌을 싸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얼굴 가득 별들이 반짝였다. 참 별들이 많기도 하다. 별은 별이다. 으스스 몸이 떨렸다. 으으 추워, 이불 빝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네 군데 창호지 문이 빤하게 환했다. 그 환한 문으로 딱새 울음소리가 찾아든다. 아내를 안으면 늘 산골짜기 논다랑지 푸른 보리밭,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떠오르곤 했다. 모래가 하얗게 깔린 작은 시내가 흐르곤 했다. 딱새는 한때 우리집에 찾아와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리더니 새끼도 깠었다. 그 딱새일까.

  집에 다 왔다.

  어둑어둑 사람들의 일하는 굽은 등이 보인다. 나락은 다말려 쌓아두고 콩타작을 한다. 옛날에 도리깨질을 하면 노란 콩, 붉은 팥, 까만 콩들이 토독토독 까지고 튀어 마루까지 튀어와 또르르 구르곤 했다. 얇고 뽀얀 먼지 위에 박히던 콩 구른 자욱, 그 끝에 노란 콩이 있었다. 콩은 구정물통에도 외양간 소 눈에도 튀었다. 어둑어둑한 마당귀까지 콩을 찾아 줍곤 했다. 이제는 경운기로 콩타작을 한다. 콩을 시멘트 길바닥에 깔아놓고 경운기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 콩이 까진다. 바퀴에 정통으로 깔려 으깨진 콩도 있다.

  저녁을 먹는다.

  집앞 텃밭에서 무를 뽑아다 어머님은 생채를 했다. 비벼 먹는다. 배추속을 뽑아다가 된장을 찍어 먹는다. 밥을 먹다가 어머님이 내 머리에 붙은 풀씨를 떼며 "너 갱변으로 왔제" 풀씨를 어둔 마당에 휙 던진다.

  순창 할머니가 어둑어둑 마을 길을 지난다. 한수형님이 경운기를 몰고 이제야 집에 온다. 종길이아재가 지게 지고 돌아온다. 모두 어둑어둑하다. 무엇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고 역사를 만드는가. 억새들은 어떻게 잠을 잘까. 나는 지금 잠이 온다 *

 

* 김용택시집[그 여자네 집]-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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