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소(謫所) - 신현정
* 적설 흰눈도 쌓이다보면 그 속이 캄캄하다
* 타인 사람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일 중에서 더욱 이름 없이 사는 일 중에서 아주 조그만 풀잎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참으로 오는 바람, 가는 바람에 조용히 나부끼고자 *
* 우체부는 더 빨리 걷지 않는다 |
우체부가 지나가니까 들국이 소담하니 핀다
* 하나님 놀다 가세요 하나님 거기서 화 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연두가 눈을 콕콕 찌르는 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는 이 들판에 와서 무어 할 거 없나 하고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하는 것이어서 옳다, 나는 누가 말목에 매어 놓고 간 염소를 줄을 있는대로 풀어주다가 아예 모가지를 벗겨주었다네 염소 가네 어디로인가 가네 나는 모르네 어디서 음메에가 들리네 하늘 언저리가 파랗게 젖어 있는 것으로 봐서 거기서 잠시 울다 간 거 같으네 아 저기저기 뿔 쬐그맣게 달고 가는 흰 구름이 저거 염소 맞을거네 나는 모르네 이 봄, 팔짝 뛰고 뒤로 자빠질 봄이네 정말 모르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염소와 풀밭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 바보사막
*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영역 산기슭 집을 샀더니 산이 딸려 왔다
* 단풍 저리 밝은 것인가
* 담에 빗자루 기대며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해바라기 해바라기 길 가다가 서 있는 것 보면 나도 우뚝 서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쓰고 벗고 하는 건방진 모자일망정 머리 위로 정중히 들어올려서는 딱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간단한 목례를 해보이고는 내딴에는 우아하기 그지 없는 원반 던지는 포즈를 취해 보는 것이다 그럴까 해를 먹어 버릴까 해를 먹고 불새를 활활 토해낼까 그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겠지 오늘도 해 돌아서 왔다 * |
* 희망
앞이 있고 그 앞에 또 앞이라 하는 것 앞에 또 앞이 있다
어느날 길을 가는 달팽이가 느닷없이 제 등에 진 집을
큰 소리나게 벼락치듯 벼락같이 내려놓고 갈 것이라는 데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말하는 앞이라 하는 것에는 분명 무엇이 있긴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전속력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기러기 울음
난 그렇게 듣는다
기러기들이 감나무 위를 날아가니까
기럭기럭 우는구나 하고 듣고
억새밭 위를 날아가니까 억새억새 우는구나 하고 듣고
또 달을 지나가니까 달빛달빛 우는구나 하고 듣는다
오늘 기러기들은 임진강에 떠 있는 임진각 위를 지나
북녘 하늘을 날아가니까 북녘북녘 우는구나
하고 나는 듣는다. *
* 외면(外面)
연잎 위에 개구리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어쩌면 저렇게 꼼짝 않고 있는 개구리 그게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바람 불어 연잎 날리고
급기야는 개구리 첨벙하고 못 속으로 뛰어들 것 같아서
아 못이 한순간에 뒤집어질 것 같아서
가부좌란 저런 동작 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연잎 위에 개구리 애써 외면하며
하늘 본다 흰구름아 어디 가느냐. *
* 종달새야 솟구쳐올라라
종달새가 하늘로 까마득히 솟구쳐오른다
또 한 마리가 솟구쳐오른다
글쎄 하늘의 무엇을 보았는지
하늘 저 속의 은밀한 무엇을 보았는지
분홍을 보았는지
하늘 한복판에 달랑달랑 매달린 열쇠를 보았는지
이내 구름 아래 세상으로 나와서
서로가 몸을 만진다
뺨을 대며 재잘댄다
이빨을 깡그리 보이며 재잘댄다
등에 올라 탄다. *
* 은사시나무
바람이 불면서 은사시나무가
일제히 잎사귀를 뒤집어 팔랑이는데
이때야말로 은사시나무가 은사시나무일 때이다
은사시나무는 배면이 은빛인 잎사귀를 뒤집어
은빛을 팔랑이며 은사시나무임을 보여준다
바람이 불면 옳거니 이 때를 놓칠세라
굳이 잎사귀를 뒤집어 보여준다. *
* 파문(波紋)
연잎 위의 이슬이
이웃 마실 가듯 한가로이 물 속으로 굴러 내리지만
여기 평화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슬 한 개 굴러내리면서
아, 수면에 고요히 눈을 뜬 동그라미가 연못을 꽉 차게
돌아나가더니만
이 안에 들어와 잠을 자던 하늘이며 나무며 산이
건곤일척(乾坤一擲) 일거에 일어서서 그 커다란 몸을 추스른다
새들, 도도히 날아간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달팽이 가다
조그만 집 한 채 구해서
벚꽃 떨어진 마른 땅을
살살 비질하며
길 한 줄 내어 가고자
달팽이처럼 전속력으로 *
* 신현정(申鉉正) 시인
-서울 사람 (1948~2009)
-1974년 [월간문학]에 시 [그믐밤의 수] 당선. 2003년 서라벌 문학상, 2004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