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노향림 시 모음

효림♡ 2010. 8. 11. 08:43

* 안면도 - 노향림   

이 여름 배낭 하나 메고 나서면
출가하듯이 몸 가벼워지네
한 끼쯤 거르고 차창에 기대다가
버스가 급커브를 돌 때마다 누군가의
어깨에 마구 휩쓸려도 좋네

해미산 능선을 넘고또 넘으면
슬금슬금 나타나는 팻말에 고남(古南)땅
그 눈썰미엔 논배미 몇이 기어가고
그 너머엔 안면도
나는 벌써 마음 반짝이는 떨기별이 되네
꽃지와 바람아래 해수욕장이거나
바다와 바다 사이에 낮게 엎드린 섬이 되네

햇빛 속에 반쯤 허리 꺾인 망초꽃들
몇몇은 목례를 보내고 있네
어선들이 급하게 빠져나간 흔적
손바닥만한 햇빛을 투망하러 갔을까
썰물 속엔 바위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네
굴따러 간 제 아내를 천년이나 기다리는
선바위라고 하네. 서 있는 좆슨바위?

밤이면 노송들 사이에서 포효하는
울음소리 나만이 듣네
안면은 내 안면에 잠 같은 건 주지 않네
백사장에서 발목 삔 기억의 저편에서
아직도 내 늑골에 유령처럼 떠다니는 안면
침몰하는 시간만 내게 주는 몸짓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라 하네 *
* 노향림시집[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

 

* 개밥바라기별 
고만고만한 살붙이들과 함께 개울가에 살았네
가난한 시절 마당가 개집 앞에
찌그러진 양푼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네
오늘 그 속에 가득히 뜨는 별을 보네
바람 한 점 없이 놀 꺼진 서녘 하늘
이팝꽃 핀 사이 불쑥 얼굴 내민 고봉밥별
그 흰 쌀밥 푸려고 깨금발을 내딛었다가 그만
돌부리에 넘어지고 말았네
허공에서 거적 같은 어둠 한 잎 툭 지고
아직도 마른하늘에서 굴러 떨어지는 아픈 별 하나
그 별 받으려고 나는 두 손 높이 받쳐 들고 서 있네
어머니가 차려 놓아준 하늘밥상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흰 고봉 쌀밥 한 그릇 *

 

* 호랑나비를 보다

천산북로(天山北路), 아직 가지 않아서 눈이 부시도록 밝은 달이
떠 있을 그곳
해오라기의 언 주둥이에 가장 둥글고 붉은 해가
찍혀 있을 그곳 *

 

* 교외 
언덕에 오르면 몇 량의 낡은 시간들을 떼어놓고
달아나는 화물차가 보였네
풀섶 끝 사르비어 꽃들이 시뻘건 피를 억억 토해내고
저 아래 골짜기로만 주택들은 한 무더기 니켈 주화(鑄貨)로 쏟아지고
어디선가 창백한 햇볕 하나가 걸려서 제 뼈가
마르는 소리를 듣네 *

 

* 어떤 개인 날

낡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펄럭인다.
슬픔이 한껏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을
더욱 팽팽하게 늘인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

* 신경림[처음처럼]-다산책방

 

* 그리운 서귀포 1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마른 갯벌엔 눈 감은 게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300 

 

* 저물녘 서강 
헬멧 쓴 갈매기들이 먼 곳 하늘을
두 날개에 싣고 곤두박질
치고 있는
저물녘 서강 앞 강물
교각을 붙들고 맴도는
어리둥절한 물결 한척
그 위에 승선한 채
비로소 웃는 햇빛들의 이빨이
부드러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깔깔대는 소란스런 웃음소리가
사람들 사이로 지고 있다 *

 

* 마루 
마른 걸레로 거실을 닦으며 
얇게 묻은 권태와 시간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미국산 수입 자작나무를 깐 
세 평의 근심 걱정을 닦으며 
지구 저쪽의 한밤중 누워 잠든 
조카딸의 잠도 소리 없이 닦아준다. 
다 해진 내 영혼의 뒤켠을 
소리 없이 닦아주는 이는 
누구일까. 
그런 걸레 하나쯤 
갖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

* 노향림시집[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

 

* 춘방다방  
단양군 별방리엔 옛날 다방이 있다
함석지붕보다 높이 걸린 춘방다방 낡은 간판
춘방이란 나이 70을 바라본다는 늙은 누이 같은 마담
향기 없이 봄꽃 지듯 깊게 주름 팬 얼굴에서
그래도 진홍 립스틱이 돋보인다
단강에 뿌옇게 물안개 핀 날 강을 건너지 못한
떠돌이 장돌뱅이들이나 길모퉁이 복덕방 김씨
지팡이 짚고 허리 꼬부라진 동네 노인들만
계란 노른자 띄운 모닝커피 한잔 시켜 놓고
종일 하릴없이 오종종 모여앉아 있다 

한참 신나게 떠들다가 오가는 사소한 잡담들이

열정과 불꽃도 없이 슬그머니 꺼져

구석의 연탄재처럼 식어서 서걱거린다

 네 평의 홀엔 다탁도 네 개, 탁자 사이로 
추억의 '빨
간 구두 아가씨'가 아직도 흐르는 곳
행운목과 대만 벤자민이 큰 키로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본다

장부 없이 외상으로 긋고 가는 커피 값
시간도 외상으로 달아놓고 허드레 것처럼 쓴다
판자문에 달린 딸랑종이 결재하듯 딸랑거린다
이 바닥에선 유일하게 한 자락 하는 춘방다방

 

* 폭설 

누가 활시위를 놓아버린 것일까
고압선에 닿듯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내리는 눈들
어느덧 두루마리로 펼쳐지며 길을 만든다
두루마리 위로 가장 눈부신 순금의 언어를
깔기 위해 눈은 그치지 않고 내린다 *

 

* 와룡마을

그 마을의 남자들은 늘 유유자적이다.

바닷일도 밭일도 모두 여자들의 몫이다.

일을 피해 집을 나온 노인들은 팔각 정자에서

아침부터 윷놀이에 열중한다.

얼씨구, 도 잡고 걸, 100원짜리 동전 내기에
이들은 점심도 굶고 해질녘까지 놀고들 있다.

꽃 피고 아지랑이 핀 봄날 누가 집에 앉아 있간디,
집에만 가면 밥맛 싹 달아나 부러, 최 영감이 한마디 한다.
오늘도 아내가 리어카를 끌고 바닷가에 나가
굴딱지 더미를 가득 실어와 손톱 닳도록
굴 까기에 여념이 없을 텐데 아예 아랑곳 않는 투다.

해가 지자 노인들은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아리랑 몇 대목을 따라 부르며 마지못해 일어선다.
동전을 제법 많이 따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최 영감은
집보다 '호박다방'에 가 목부터 축이자고 한다.
점심 굶은 일행은 먼저 붕어빵 가게로 몰려간다.
배가 고픈 길에 붕어빵을 열심히 나눠 먹는다.

저마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 맛 좋다고
젊은 마담에게 한마디씩 하는데 갑자기
문창 밖으로 낯익은 아낙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메, 남은 뼈 빠지게 굴 까는데,
영감 돈이 썩어나서 커피 사 묵어?

그의 아내가 최의 귀때기를 잡고 끌고 나간 것은

잠깐이었다. 남은 노인들은 날마다 보는 풍경이라는 듯

커피를 마저 마신다 다방 안은 다시 조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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