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의 성분 - 허만하
최초의 인간이 흘렸던 한 방울 눈물 안에 모든 시대의 슬픔이 녹아 있듯 바다에는 소금이 녹아 있다. 뺨을 흘러내리는 최초의 한 방울이 머금고 있었던 가장 순결한 푸름. 바람이 불타는 누런 보리밭에서 낫질하는 사람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 안에 바다가 있다. 낯선 도시 밤하늘 먼 별빛을 바라보는 눈에 고이는 눈물 안에 바다가 있다
바다(海) 안에는 어머니(母)가 있다. 발가숭이 알몸의 내가 최초의 물을 온몸으로 느꼈던 기억 이전의 바다. 내 목숨 최초의 열 달을 한 마리 물고기처럼 캄캄한 그 안에서 촉감으로 사귀었던 태초의 바다. 어머니 사랑처럼 한계가 없는 아, 눈부신 바다 *
* 균열
모세혈관보다 가는 실금이 처음으로 찾아들었던 것은 풍화를 앞둔 바위의 표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주체의 내부였다. 더러움에 물드는 손을 실감하면서도 굴욕적으로 타협하는 자아와 바다 빛 잉크로 피난도시 밤하늘 별빛의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쓰는 또 하나의 자아 사이의 균열을 계절보다 먼저 느낀 시인. 오렌지 빛 알전구 불빛이 밀려드는 바다안개처럼 흐린 대폿집 비좁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그 시인의 등은 어떤 경사면보다 적막했다 *
* 그리움은 물질이다 -아이작 뉴턴에게
이론과 현실의 틈새는 아득하다. 꽃잎이 바람에 밀리고 있다. 거리를 사이에 둔 사물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육체가 없는 물질이 머금고 있는 그늘진 외로움. 외로움의 극한에서 물질은 행동한다. 하르르 지는 꽃잎과 지구 사이에 서려 있는
아득한 그리움을 시는 본다. 그리움은 틀림없는 물질이다 *
* 꽃잎에 앉은 나비
나비는 지친 날개의 파편을 접고
스펭글러의 짙푸른 도라지꽃 잎사귀
저무는 역사의 언저리에 간신히 내려앉았다
케스타 지형의 풍화한 비탈
나비의 몸무게만 한 그늘을 첨가하여
사력(砂礫)은 보드라운 햇살을 흡수하고 있었다
나비가 이따금씩 짙푸른 수면을 찰 때마다
가녀린 도라지의 줄기는
전율하듯 두세 번씩 떨고는
이내 원래의 체위에 돌아갔다
물이랑 치는 은빛 들국화의 군락 위
다가오는 피비린 종언을 예감한 듯
환장한 듯이 날뛰는 백나비 떼들 틈에
몇 마리 호랑나비도 섞여 있다
이들은 마지막 살아남은 인간마저
절멸한 뒤의
빈 시간의 산협에 딩굴고 있을
그 수많은 니힐의 낙엽들이다
인적 없는 바다의 몸부림 위에
치열히 내리고 있을 자욱한 눈송이이다
이윽고, 그것은 마지막 시간의 기슭에 몰려
누런 송홧가루같이 부유해 있을
수천, 수만의 나비들의 시체다 *
* 가을바람
넘쳐 흘러내리는 시원한 매미 울음소리와
더위에 지친 옥수수 잎사귀의 와삭거림
그 사이
고추잠자리 날개에 주황색 묻어나는 늦더위와
코발트블루 해맑은 높이에서 사라지는 눈부심
그 사이
황금색 물결 넘실거리는 들녘 끝자락과
논두렁 억새 서너 포기의 가녀린 몸짓
그 사이
거미줄처럼 가늘게 내리는 따가운 햇살과
짐승처럼 드러누운 얼룩진 가로수 그늘
그 사이 *
* 아득히 먼 길을 새라 부르다가
아득한 지평선을 향하여 힘껏 팔매질한 돌이 떨어지기 직전 갑자기 몸을 뒤집어 날개를 펼치고 타오르는 홍시빛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몸짓을 새라 부르다가
조용히 퍼지는 종소리에 떠밀려 잠이 덜 깬 아침 하늘 환한 언저리에 제자리걸음으로 간신히 떠 있는 한 무리 맑은 지저귐을
새라 부르다가
아득히 먼 별자리 바라보며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한 해에 한 번 가슴 설레는 먼 길을 건너는 수천 마리 새떼의 부드럽고도 모진 날갯짓을 새라 부르다가, 부르다가 *
*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
* 다슬기
섬진강 상류 밤나무 숲길 식당 아주머니는 대살이라 했다. 대구에서는 고딩이라고 한다는 내 억양을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으로 응답하는 부드러운 미소의 여울.
모래연기가 가라앉자 맑은 흐름 수면에 어른 어른 떠오르는 어릴 적 돌밭을 다슬기가 한 마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투리와 사투리 틈새가 아니라 세계와 언어의 틈새를 기고 있는 행보를 바라본다. 말이 빚어내는 미학적 공간에 갇힌 시인처럼 살아서는 자기가 분비한 언어의 성채 바깥을 나서지 못하는 다슬기.
졸깃졸깃한 진주색 근육에 붙은 초록색 미주알을 나선형으로 감아 돌린 석회질 움집에 담고 미숫가루 같은 물이끼 낀 차돌 위를 육중한 기관차처럼 앞으로 움직이고 있다. 비가 그친 뒷자리에 피어나는 맑은 물 냄새를 더듬어 서서히 자리를 옮기는 다슬기. 다슬기는 번득이는 은어의 은백색 속도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느냐 하는 것은 어떤 몸짓으로 꽃이 지느냐 하는 것처럼 백척간두 아름다운 선택이다.
산수유 숲 환한 꽃 그늘 다시 찾아 지팡이를 끌고 지리산 자락 돌담길을 염주알 세듯 걸어 오른다. 다슬기가 몸으로 그리는 궤적같이 느린 속도가 여는 또다른 세계의 다정한 눈길. 파란 하늘 한 포기 솜털구름 그늘 지나는 때 기다려 와삭와삭 서걱이기 시작하는 조릿대 잎새. 양지 바른 바위에 붙어 꼼짝하지 않는 네발나비 화사한 적갈색 날개 위에 내리는 결 고운 햇살. *
* 허만하[허만하 시선집]-솔
* 길 -박수근의 그림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걸었던 바람 부는 길을 이젤처럼 둘러메고 양구를 떠났습니다
나는 겨레의 향내가 되고 싶습니다
가야 토기의 살갗같이 우울한 듯 안으로 비바람에 시달린 바위의 살결같이 거칠고도 푸근한 어머니의 손등을 그리고 말 것입니다
어머니가 끓이시던 시래기국 맛을 그리겠습니다
어머니, 나를 잡아끌던 어머니의 손이 탯줄인 것을 나는 압니다
잎 진 가지 끝에 바람 부는 겨울 그립습니다 *
* 횟집 어항 앞에서
벽은 물처럼 투명하다
끊임없이 물을 젓는 전어 한 마리
지느러미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고
몸무게가 거의 어항 바닥에 가라앉는
위기의 지점에서
느닷없이 몸을 뒤집는 전어
말의 감옥을 벗어나려는 시의 몸부림
아름답다
물고기 은빛 옆구리처럼 번득이는
로고스의 반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산가족 버스
유리창 안팎에서 마지막 체온을 더듬는
애처로운 손바닥처럼
네모난 유리벽에 거의 밀착한 위치에서
반쯤 벌어진 숨찬 입술이
벌름거리고 있다
* 야생의 꽃
의미에서 풀려난 소리는 비로소 아름답다. 숲 속에서 새의 지저귐 소리를 들어보라. 물에 비친 가지 끝 섬세한 떨림을 보라. 의미는 스스로를 노출하지 않는다. 말이 되기 이전의 의미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꽃나무. 지는 꽃잎은 소리를 가지지 않는다. 침묵의 배후에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들녘을 보라. 사람의 시선이 머문 적 없는 야생의 꽃들이 피어 있다. 흰색 가운데서 흰 꽃잎은 희지 않은 것 가운데서 흰 것보다 본질적으로 희다. 꽃들은 정직하게 미래를 믿고 있다. 흰 꽃잎은 순결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희다. 이름 없는 들꽃들이 저마다 다른 빛깔의 꽃가루를 만들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씨앗을 보라. 목숨은 역사 이전의 다른 별까지 날아간다. 지구가 사라진 뒤의 낯선 천체 위에서 꽃들은 바람도 없이 온몸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불멸의 언어처럼 여린 몸짓으로 인류를 추억할 것이다. *
* 금목서 향기
송악산 벼랑 끝에서 발꿈치를 들어도 톱날 선 서남쪽 수평선 가물거림과 바닷바람뿐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이어도는 있다. 머릿속인지 가슴속인지 그 소재는 분명치 않지만, 우리 몸의 어딘가에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가지고 있다. 꿈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저마다의 얼굴을 자기가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운 직접성은 보이지 않는다. 딸아이는 는개에 젖은 숙소 숲길에 서려있던 금목서 진한 향기를 마라도 서남쪽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있는 이어도에서 우리를 찾아온 꿈의 향기라 했다. 지상에서 소중한 한 계절을 더불어 지낸, 등겨만 한 등황색 꽃이 무너지면서 이승에 남긴 최후의 향기. *
* 허만하시집[야생의 꽃]-솔
* 이별
자작나무 숲을 지나자 사람이 사라진 빈 마을이 나타났다.
강은 이 마을에서 잠시 방향을 잃는다. 강물에 비치는 길손의
물빛 향수. 행방을 잃은 여자의 음영만 짙어가고
파스테르나크의 가죽장화가 밟았던 눈길. 그는 언제나 뒷모
습의 초상화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에서 무너지는 눈사태의
눈부심. 눈보라가 그치고 모처럼 쏱아지는 햇살마저 하늘의
높이에서 폭포처럼 얼어있다.
우랄의 산줄기를 바라보는 평원에서 물기에 젖은 관능도 마
지막 포옹도 국경도 썰렁한 겨울 풍경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선지피를 흘리는 혁명도 평원을 건너는 늙은 바람도 끝없는
자작나무 숲에 지나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광야에서는 지도도
말을 잃어버린다. 아득한 언저리뿐이다.
평원에서
있다는 것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그는 뒷모습이다.
휘어진 눈길의 끝
엷은 썰매소리 같은 회한의 이력
아득한 숲의 저 켠.
풍경을 거절하는
나도
쓸쓸한 지평선이 되어버리는.
* 허만하(許萬夏) 시인
-1932년 대구 출생-1957년 [문학예술]지에 詩 추천으로 등단, 1999년 박용래문학상, 2004년 청마문학상, 2009년 목월문학상 수상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허만하 시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