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들레 - 이응인
맑은 날
초록 둑길에
뉘 집 아이 놀러 나와
노란 발자국
콕 콕 콕
찍었을까 *
* 어디 우산 놓고 오듯 -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
* 꽃시간 - 정현종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 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
*그땐 왜 몰랐을까 - 정채봉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붙들었어야 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
* 형화(螢火) - 함형수
논두렁에 잠방이를 적시고 개울물에 발을 적시고 어두운 잔디밭을
조오그만 가닥손을 취어든 채 소년은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달렸다
파아란 반딧불, 그것은 움직이는 또 다른 별이었다 *
* 나는 너다- 109 - 황지우
"여보, 지금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죽어가는 게의 꿈벅거리는 눈을 보고 올래?
* 솟대 - 김양수
그리움보다 더 깊은 어둠이 있을까
기다림보다 더한 목마름이 있을까
외로움보다 더 긴 메아리가 있을까
나는 오늘도
바람의 끝을 따라
투명한 솟대를 돋운다 *
* 비 그치고 - 신현정
지렁이가 지평을 고르고 있다
예쁜 해가 뜨도록 지평을 고르고 있다 *
* 저문 외길에서 - 박남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가는 것
그는 모르는지
길 끝까지 간다
가는데 갔는데
기다려본 사람만이 그 그리움을 안다
무너져내려본 사람만이 이 절망을 안다
저문 외길에서 사내가 운다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 *
* 하루살이 때 - 정병근
숨이 떨어지기 전에
하나의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내일이 있는 자만 집으로 돌아간다
망설임은 기약하는 자의 변명일 뿐
천변을 따라 천 개의 기둥이 일어선다
저 오랜 한순간이 모여서
폐허를 만든다 번창하였으므로
멸망은 폐허 속에서만 발굴된다
어제도 내일도 없이
달랑 오늘뿐인
한 문장 미만의 붉은 내력들 *
* 봄비 -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 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에 속삭일 때다 *
* 항아리 - 이가림
누가 밤새 길어다 부었는가
뒤뜨락 항아리에 가득 고인
저 찰랑이는 옥(玉)
빛 눈물의 은하수 *
*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 꽃 진 자리에 - 문태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
* 나그네 - 안도현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
* 소나기 - 이해인
여럿이 오는데도
쓸쓸해 보입니다
큰 소리 내는데도
외로워 보입니다
위로해주고 싶어
창문을 열었더니
뚝! 그쳐버린 하얀 비 *
* 번개 - 오세영
무더위에 지치면
지구도 게으름을 피우는 것
황도(黃道)에서 벗어나
낮잠에 빠졌다고
벽력같이 치는 호통 소리
번쩍
정신 나게 따귀 때리는 소리
주르륵 눈물을 쏟는다
무사히 걸어갈 수 있을까. 또 한해, 아무 데도 없으면서 아무 데나 있는 길 *
* 석양 - 허형만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 *
* 눈부신 날 - 허형만
참새 한 마리
햇살 부스러기 콕콕 쪼아대는
하, 눈부신 날 *
* 가짜 - 허형만
스님, 김남조 시인이 누님이시라면서요
옆자리에 앉은 오탁번 시인이 장난을 거신다
글쎄, 그게, 중이란 게 나이를 알지 못해서.....
큰 스님이 딴청을 피우시다가 한 말씀 하시는데
나는 중 옷만 입었지 가짜 중이야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내 정수리가 뻥 뚫리는 듯했다
저리 큰 스님이 가짜 중이라니, 그럼 나는?
가짜 교수? 가짜 시인?
어쩐지 요즘 육십 세월이 헐겁더라니.....
그날 밤 나는 오탁번 시인과 왕십리에서 대취했다 *
* 폭설 - 노향림
누가 활시위를 놓아버린 것일까
고압선에 닿듯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내리는 눈들
어느덧 두루마리로 펼쳐지며 길을 만든다
두루마리 위로 가장 눈부신 순금의 언어를
깔기 위해 눈은 그치지 않고 내린다 *
* 비 그치고 - 류시화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 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녘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 바닥 1 - 동길산
비는
위부터 적시지만
가장 많이 젖는 것은
바닥이다
피함도 없이
거부도 없이
모든 물기를 받아들인다
비에 젖지 않는 것은 없지만
바닥에 이르러 비로소 흥건히 젖는다
바닥은 늘 비어 있다 *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 이승희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움푹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대는 달
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는 시절에 *
* 연잎 -만남의 신비 - 김영무
떠돌이 빗방울들 연잎을 만나 진주알 되었다//
나의 연잎은 어디 계신가,//
나는 누구의 연잎일 수 있을까 *
* 향수 - 김상용
인적 끊긴 산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 추억 - 김규동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첫 시집을 낸 지
쉰 해 가깝도록
그 빚을 갚지 못했다
시집이 팔리는 대로
수금을 해서는
박인환이랑 수영이랑 함께 술을 마셔버렸다
거짓말쟁이에게도
때로 눈물은 있다 *
* 추사 - 장석주
봉은사에 가면 판전(板殿)이라는
딱 두 자 현판 글씨를 보고 오너라.
서툴고 졸렬하다.
지독히 못생긴 저 글씨에
내 심장 그만 멎는다.
붓 천 자루가 닳아 몽당붓이 되고
벼루 열 개가 닳아 구멍이 뚫렸다.
이만한 수고도 없이
추사 솜씨 얻었겠나! *
* 장석주시집[몽해항로]-민음사
* 7번국도 -등명(燈明)이라는 곳 - 이홍섭
사랑도 만질 수 있어야 사랑이다
아지랭이
아지랭이
아지랭이
길게 손을 내밀어
햇빛 속 가장 깊은 속살을
만지니
그 물컹거림으로
나는 할 말을 다 했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