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배한봉 시 모음

효림♡ 2010. 8. 9. 08:18

* 자연도서관 - 배한봉  
부들과 창포가 뙤약볕 아래서
목하 독서중이다, 바람 불 때마다
책장 넘기는 소리 들리고
더러는 시집을 읽는지 목소리가 창랑(滄浪) 같다
물방개나 소금쟁이가 철없이 장난 걸어올 때에도
어깨 몇 번 출렁거려 다 받아주는
싱싱한 오후, 멀리 갯버들도 목하 독서중이다
바람이 풀어놓은 수만 권 책으로
설렁설렁 더위 식히는 도서관, 그 한켠에선
백로나 물닭 가족이 춤과 노래 마당 펼치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가 깊어가고
나는 수시로 그 초록 이야기 듣는다
그러다가 스스로 창랑(滄浪)의 책이 되는 늪에는
수만 갈래 길이 태어나고
아득한 옛날의 공룡들이 살아 나오고
무수한 언어들이 적막 속에서 첨벙거린다
이때부터는 신의 독서 시간이다
내일 새벽에는 매우 신선한 바람이 불 것이다
자연도서관에 들기 위해서는
날마다 샛별에 마음 씻어야 한다 *

 

* 대비(大悲) 
물은, 차마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났다

나무는, 차마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날 수 없어서 그 자리에 붙박였다 * 

 

* 그늘을 가진 사람

양파는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든다고 한다
고통의 위력은
쓸개 빠진 삶을 철들게 하고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한다
훌쩍 봄을 건너뛴 소만 한나절
양파를 뽑는 그의 손길에
툭툭, 삶도 뽑혀 수북이 쌓인다
둥글고 붉은 빛깔의
매운 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확한 생각들이 둥글게, 둥글게 굴러가는
묵시록의 양파밭
많이 헤맸던 일생을 심어도
이젠 시퍼렇게 잘 자라겠다
외로움도 매운맛이 박혀야 알뿌리가 생기고
삶도 그 외로움 품을 줄 안다
마침내 그는
그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
* 배한봉시집[우포늪 왁새]-시와 시학사

 

* 물의 신전(神殿)
아침은
지상의 거주자들을 위해 노래한다
산천 곳곳에다 공손히 햇살을 풀어 놓고
달디단 새들의 잠
속에서 끄집어낸 노래를 공중에 흩는다
어둠에 젖었던 대지의 입술에
자오록한 물안개에 싸인 늪의 가슴에
긴병꽃풀 같은 온기로
사랑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비로소 지느러미 흔들며 입을 뻐끔거리는 물고기와
부화된 유충들의 오랜 믿음이
한 뜸씩 유영의 무늬를 수놓는 물의 성소
이제 막 새순 틔우기 시작한
물오리나무 그림자가 받쳐든 몇 겹 파문 속으로
바람이 연둣빛 고요한 시간의 잎과 줄기를 퉁기자
은구슬 소리가 난다
너무 투명해서 눈이 아픈 이 광휘의 풍경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거니, 1억4천만 년 전부터
물면은 햇빛 곧게 세워 이 신전을 만들었으리
이곳에서 평온의 샘은 솟고
휴식을 마친 철새들은 다시 여정에 오른다
우리는 모두 빛의 축복을 받은 동행자
자유와 방종의 긴 여정 뒤에 물이 얻은
안온 속에서 푸석푸석한 어둠조차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한 은비늘로 파닥거리더니
꽃은 피고 나비는 환하게 나는 것이다
기슭에서 화석의 잠을 굴리는 고둥껍질
원시 적 빗방울을 머금은 저층늪의 뿌리들
무수한 생과 멸을 끌고 온 세월이
사리알처럼 영롱해서 새삼 나는
짧은 일생을 활짝 펴 햇살에 비춰보는 것이다
가자, 희망의 층계를 올라
아침을 타종할 때
우리는 황금의 시간을 얻으리라
그대와 내가 열어가야만 할 세계를 위해
만다라를 공양하는 물의 신전 우포늪 *

 

* 아름다운 수작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 아름다운 동행

오늘도 우리가 걷는 길은 신성하고

길가의 들꽃 한 송이는 밤의 등불만큼 아름답습니다

 

가난한 사랑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개밥바라기가 받쳐든 등잔에 마지막 기름을 붓고

풀잎에 우주의 맑은 땀방울인 이슬 매다는 새벽

 

우리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마지막 어둠 배웅하는 지상의 등불을 위해

기꺼이 더 가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푸른 힘이 은유의 길을 만든다
바람 불고 잎들이
뒤척거린다
그 아래 잎들의 신음이 쌓여
그림자가 얼룩지고 있다
산책 나온 아침, 눈이 동그래진다

나뭇잎에 허공 길이 뚫리고
거기 헛발 디딘 햇빛
금싸라기를 쏟아 세상이 다 환해진다
아 나뭇잎 허공
벌레먹은 이 자리가

우화를 기다리는 은유의 길이라니
허공에 빠진 내 생각 뜯어먹으며
또 살찐 벌레 한 마리 지나간다 *

 

* 이 시대의 변죽 
변죽을 아시는지요
그릇 따위의 가장자리, 사람으로 치면
저 변방의 농군이나 서생들
변죽 울리지 말라고 걸핏하면 무시하던
그 변죽을 이제 울려야겠군요
변죽 있으므로 복판도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려줘야겠군요
그 중심도 실은 그릇의 일부
변죽 없는 그릇은 이미 그릇이 아니지요
당신, 아시는지요
당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변죽,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변죽,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변죽, 삼거웃 없는 마음을
중심에 두고 싶은
변죽을 쳐도 울지 않는 복판을 가진
이 시대의 슬프고 아픈 변죽들을 *

 

* 타관 
가을 나무로 친다면, 우리 고향집 뒤뜰의
불타는 감나무만 한 것이 있으랴
정오의 날빛을 퉁기며 붉게 채색되는 풍경의 시간들
얼레가 풀려 하늘 높이 가 닿는 마음 한참 동안
어질머리로 견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채 익지도 않은 열매 몇 개 서둘고 떨구고 선
저 고층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
단풍 예쁘게 들었다고 이웃들은 한참이나 감탄하지만
타관에 뿌리박은 고단함 감추려고 기를 쓴 탓은 아닌지
가지 뻗을 데라곤 막막한 세월뿐이어서
희끗희끗 늙어 가는 망명정부 같다
저 나무들 시들시들 흔들리는 잎을 보니 자꾸만
우리 고향집 뒤뜰의 감나무가 생각난다
상강 지나 입동 무렵
치렁치렁 매단 햇빛으로 대금소리를 내며
둥글게, 둥글게 불타던 열매, 열매들 *

 

* 11월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 

 

* 반짝이는 늪에 관한 명상 
아침은, 물면을 가득 덮은 개구리밥, 생이가래 위로 빛의 그물을 던진다, 부들과 창포, 왕버들 잎사귀에 맺힌 이슬의 긴장이 그 엽맥까지 투명하게 비춘다. 빛이 닿을 때마다 그 팽팽한 힘에 퉁겨 파멸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저 물방울, 물방울들의 투신. 그때

개구리가 초록동색으로 울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물방울이 물면을 퉁길 때의 그 눈부신 파멸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율하듯이 소금쟁이, 물땡땡이, 게아재비가 튀어 오른다. 튀어 올랐다가 자맥질한다. 물닭 가족이 지나가고 고니 떼가 날아오른다. 이 불멸의 길,

1억 년의 삶과 역사가 기록돼 있기 때문일까? 늪은 사색의 눈을 뜨고 꿈틀거린다. 하늘을 끌어안고 몇 점 구름을 띄우는 저 검초록

영혼의 심연, 양수 출렁이는 자궁 내부의 어둠이 부초들의 뿌리에 젖을 물린다. 물면의 햇빛과 만나는 태초의 어둠. 이것은 우주의 블랙홀이다. 에너지의 집합체인 블랙홀. 그곳에서 생멸을 거듭해온 존재들, 빛 이전의 빛, 생명 이전의 생명이 빅뱅의 기운을 타고 치솟는 것 본다. 깊고 어두운 자궁을 향해 아침은 쉴새없이 빛의 금가루를 뿌린다. 존재의 고향, 축축하고 질퍽하고 어두운 심연의 땅바닥까지 온기를 밀어 넣는다. 산란기를 맞은 물고기들은 열심히 알을 낳을 것이고, 배부른 왜가리는 오랫동안 둥지의 알을 품을 것이다. 그렇구나. 늪이 반짝이는 것은 크고 작은 우주들의 눈부신 운행이 그려내는 파문 때문이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영원히 멸하는 않을 생명들이 벌이는 그 찬란한 화엄의 잔치 *

 

* 씨팔!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앗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 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질문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배한봉시인

-1962년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등단, 2010년 현대시작품상 수상

*시집 [우포늪 왁새][흑조][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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