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선화 - 김광섭
매암의 소리 맑게 흐르는 아침
남쪽 뜰 안 환상의 화단 속에
한 소녀가 봉선화를 따고 있으니
나는 8월의 소년이 됩니다
* 입추 - 김용택
텃밭에 배추 씨 묻고
그대는 내 품을 파고드네. *
* 민가(民家) - 장석남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간다
과연 이 말이 맞을까
저녁 햇빛 한줌을 쥐었다 놓는다
초록을 이제는 심심해하는
8월의 가로수 나뭇잎들 아래
그 나뭇잎의 그늘로 앉아서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을
나무와 나와는 지금 점치고 있는 것인가
종일 착하게 살아야 보이는 별들도 있으리
안 보이는 별이 가득한 하늘 바라보며
골목에서 아득히 어둡고 있었다
첫 나뭇잎이 하나 지고 있었다 *
* 입추(立秋) - 유치환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넘어 하늘이 한 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
* 하마치울 - 벌써 추울
* 8월 - 오세영
8월은
분별을
일깨워 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달.
*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
* 처서(處暑) -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십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 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소리 알은채 별처럼 시끄럽다 *
* 8월 - 김사인
긴 머리 가시내를 하나 뒤에 싣고 말이지
야마하 150
부다당 들이 밟으며 썅,
탑동 바닷가나 한바탕 내달렷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
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같은 바다한테
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
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
부다당 부다다당
내리꽂고 싶은 거지
깡소주 나발불듯
총알 같은 볕을 뚫고 말이지 썅, *
* 8월의 연가(戀歌) - 오광수
8월에
그대는 빨간 장미가 되세요
나는
그대의 꽃잎에 머무르는 햇살이 되렵니다
그대는 초록세상에 아름다움이 되고
힘겨운 대지에는 꿈이 되리니
나는
그대를 위해 정열을 아끼지 않으렵니다
푸른 파도의 손짓도 외면하렵니다
오로지 그대를 향해
뜨거운 사랑의 눈길을 쉬임없이 보내며
빨갛게 빨갛게 그대의 색깔을 품으렵니다
매미들의 향연이 막을 내리고
저 들판 너머로 꽃가마가 나타나면은
나는 믿음직한 그대의 신랑이 되고
그대는 노란 머플러로 한껏 멋낸 신부가 되리니
아!
두근거리는 땅의 울림에
한줄기 소나기까지 단비가 되어
지금 그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8월에
그대는 빨간 장미가 되세요
나는
하늘의 푸른 물 한 줌 씩 집어다가
두 손으로 돌돌 말아 이슬진주 만들어
그대의 가슴에 달아드리는
아침햇살이 되렵니다 *
*오광수시집 [내가 당신에게 행복이길]-고이북
* 팔월상서(八月上書) - 고은
아버지 세벌 김은 다 매셨는지요
마을의 가죽나무 잎사귀 늘어지고
어디에 그늘인들 바람 선선한 그늘이겠습니까
논물은 그런대로 괜찮은지요
이제는 동네방네 물코싸움도 덜하겠지요
제초약 뿌린다 해도
벼 속의 피 한 줄기는 질겨서
늙은 아버지는
바위박이 논뱀이 피사리를 하시는지요
밭두렁은 사나운 쇠비름 명아주풀
몇 섬지기 논에는 벼멸구 걱정이 떠나지 않겠지요
농촌지도소 말치레 그대로 따라서는 도려 큰일나지요
곡식 뿌리야 다치기 쉽고
심복 불볕에도 잔일손 쉴 수 있겠습니까
더덕 같은 손발 백도라지 허리는 어떠하시며
등거리 등때기 허물 얼마나 벗겨지셨는지요
볍씨 찰보리 종자 뿌려서 기르고
그것을 거두는 일밖에 없어도
우순풍조밖에 바랄 것 없어도
그 일이면 어느 나라 일보다 큰일 아닙니까
흰 구름도 때로는 눈코 뜰 새 없습니다
남의 것 내 것 할 것 없이
팔월 한 달의 들은 검푸르러서
산에라도 올라가면
그 드넓은 벙어리들이 무서운 우리입니다
산 것 하나도 숨지 않고
제 목숨 다 열어서 사는 제철입니다
여름은 으뜸으로 장합니다
산딸기 고름이 터지고
새터고개 으악새 서슬에 살을 베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도 이미 아버지
태어나기를 논밭에서 태어나서
이웃집 쌍둥이 서방과 함께 늙으셨지요
모를 낼 때 거머리 피 빨리고
몇 십년 동안 김을 매어
어화자 지화자 아버지의 긴 허리 얼마나 굽으셨는지요
심기보다 기르기 어렵고 길러놓아도 걱정뿐이언만
토지수득세 연부상환 신곡 곡식값으로 걱정뿐이언만
마을 젊은이는 사내녀석도 쪼깐이들도 다 떠나고
늙스구레 해동갑 하루하루 빈 마을이언만
그래도 저녁나절 돌아오는 징소리 사이에
막내동이 깽매기소리가 요란하면
보릿대 연기로 자욱한 마을이
해 넘어간 쪽으로 아버지와 춤이 덩실 하나였지요
아버지 술 한 병 노랑태 한 죽 사가지고 가렵니다
아버지 산소에 가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