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천사에 가면 - 전동균
부처를 모신
대웅전에 가지 않는다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석탑을 보지 않는다
영험 많은 산신각 문고리도 잡지 않는다
삼천사에 가면 나는
슬픔을 품듯
허공을 안고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풍경 소리
경문(經文)처럼 마음에 새기며
대웅전 지나
산신각 지나
그늘진 뒤안 요사채 맨 끝 방
섬돌에 놓인
흰 고무신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 벗어둔 지 오래된 듯
빗물 고여 있고 먼지도 쌓여 있는
그 고무신을 한참 보고 있으면
뚝,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
내 이마를 서늘하게 때리며 지나가고 (아, 아픈 한 생이 지나가고)
가끔은
담 밑 구멍을 들락거리는 산쥐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전생의 제 모습을 기억한다는 듯 *
* 초승달 아래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내려,
강릉場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그락거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
* 몇 줌 시린 햇볕에도
지난밤 바람이 몹시 불더니, 하느님이 다녀가셨는가?
옆집에 마실 오듯 슬쩍 다녀가셨는가?
이파리들 다 떨구고
차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떠꺼머리총각처럼 서 있는 저 감나무
몇 줌 시린 햇볕에도
한없이 떨며 깊어지는
극빈의 그늘 속에
새소리, 새소리들
발목 붉은 새 울음소리들
이 세상을 다 가진 듯 맑고 높게
반짝이고 있으니
이런 날 내 공부는
경전이고 나발이고 읽던 책 탁 덮고
밖으로 나가
빨랫줄에 빨래를 널거나 마당을 쓸거나 아니면 빈둥빈둥 구름을 쳐다보며
눈 밑 점이 이쁜
한 사람을 생각하거나! *
* 까막눈 하느님
해도 안 뜬 새벽부터
산비탈 밭에 나와 이슬 털며 깨단 묶는
회촌마을 강씨 영감
성경 한 줄 못 읽는 까막눈이지만
주일이면 새 옷 갈아입고
경운기 몰고
시오리 밖 흥업공소에 미사 드리러 간다네
꾸벅꾸벅 졸다 깨다
미사 끝나면
사거리 옴팍집 손두부 막걸리를
하느님께 올린다네
아직은 쓸 만한 몸뚱아리
농투성이 하느님께 한 잔
만득이 외아들 시퍼런 못물 속으로 데리고 간
똥강아지 하느님께 한 잔
모 심을땐 참꽃같고
추수할 땐 개좆같은
세상에게도 한 잔.....
그러다가 투덜투덜 투덜대는
경운기 짐칸에 실려
돌아온다네 *
* 얼음폭포 근처
눈 맞으며 서서 죽는 나무들을 보았네
한겨울 가리왕산 얼음폭포 근처
어떤 나무들은
무릎 꿇고
얼어붙은 땅에 더운 숨을 불어넣듯
맨얼굴 부비고 있었네
얼마나 더 싸우고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지복(至福)의 저 풍경 속에 가 닿을 수 있을지
나는 신발 끈을 묶는 척 돌아서서
눈물 훔치고는
이빨을 꽉 물고 내려왔네
빈방에 속옷 빨래들이 널려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
* 물소리에 기대어
눈 쌓인 얼음의 골짜기 아래로
흘러가는 찬 물소리
어쩌면 내 삶은
말 못 하는 짐승 같은 것으로 다시
태어날지 몰라, 중얼거리면서
속이 훤히 비치는 물소리에 기대어
마음은 오래된 흙처럼
착해지고
떨어진 황혼의 깃털 하나에도
절하고 싶은 것을 *
* 나뭇가지를 꼭 쥐고
쏘내기 퍼붓듯 쏟아지는
만개의 꽃빛들보다도
이 꽃빛들을 안고
새로 나온 푸른 이파리들보다도
그 뒤에 숨어 있는
뒤틀리고 구부러진 나뭇가지들에게
더 자주 눈길 건너가고
가슴 먹먹해지나니
이 서러운 묵언(默言)의 나뭇가지들 꼭 쥐고
어루만지나니 그 누구의
몸인 듯 마음인 듯 *
* 들꽃 한 송이에도
떠나가는 것들을 위하여 저녁 들판에는
흰 연기 자욱하게 피어 오르니
누군가 낯선 마을을 지나가며
문득, 밥 타는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춘 채 오랫동안 고개 숙이리라
길 가에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도 *
* 타고난 사랑
2006년 10월 21일 12시 44분
토지문화관 앞 회촌 종점을 막 출발한 버스가 야트막한 고갯길을 굽어 돌다가 갑자기 끼익, 급정거를 하고는 꼼짝을 않고
한참이나 서 있습니다
산뱀이 길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며 *
* 어떤 손을 생각하며
백련산 밑 공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길
숲길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저물녘이면 울음을 참듯
고개 숙인 나무들 아래
默言修行하는 스님들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쳐올 뿐
오늘처럼
그 길 앞에 서성이다 서성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늦도록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를 받아주던 어떤 손을 생각하며
홈통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도
소주잔을 건네는 것이다 *
* 파문
백로(白露) 며칠 지나
점점 여물어 가는 계곡 물 위에
나뭇잎 한 장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 흘러가던 물은
젖 먹는 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려
나뭇잎이 품고 있던 하늘과
나뭇잎에 새겨진 천둥과 빗줄기와
수많은 音色으로 반짝이던 고요마저
한꺼번에 빨아들이고,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산 아래로 내려가고
물이 떠난 자리에 물소리 남아 있듯
오랫동안 떨며 지워지지 않는
나뭇잎의 파문
그 속에는 세상을 떠돌던 한 사람이 쪼그려 앉아
ㅡ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와 있구나
낯선 짐승 같기만 한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
으슬으슬한
저녁답, 가랑잎 부서지는 소리가
자꾸 발밑에서 들렸네
어두워지기 전에 강물은
푸른 회초리처럼 휘어졌다가
흉터 많은 내 이마를 후려치고
아까보다는 훨씬 더 깊어져
불빛도 안 켜진 사람의 마을 쪽으로
그렁그렁 흘러갔네
ㅡ내 눈에는 왜 모래알이
서걱이는지 몰라, 눈을 뜰 때마다
눈 못 뜨게 매운 연기가
어디서 차오르는지 몰라
잘못 살아왔다고, 너무
아프게 자책하지 말라고
갈 곳 없는 새들은
물에 잠긴 옛집 나무 그림자를 흔들며
석유곤로에 냄비밥을 안치는
독거(獨居)의 마음속으로 떼지어 날아들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녁답, 나는
집에 안 가려 떼를 쓰는
새끼염소나 달래면서 *
휘어져, 한껏
휘어져
마침내 세상 밖으로 탈주할 것 같은
저 팽팽한 떨림 속에
휙
새 한 마리 지나가자
순간, 있는 힘 다해
눈을 터는 댓잎들
제 몸을 때리며
시퍼렇게 멍든 제 몸을
제가 때리며
참회하듯 눈을 터는 댓잎들은
어찌 저리 맑은 빛을 내뿜는지
어찌 저리 곧은 생을 부르는지
속수무책, 나는
갈 곳 없는 죄인이다 *
작은 길 옆에는 아름드리 굴참나무 한 그루 있는데요 콸콸 쏟아지는 계곡 물소리에 온갖 나무들이 햇잎을 가득 피워올릴 때도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
* 전동균시집[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
* 전동균 시인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6년 [소설문학]신인상 당선 1998년 서라벌 문학상, 1986년 소설문학사 신인상 수상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거룩한 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