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전동균 시 모음

효림♡ 2010. 8. 18. 08:00

* 삼천사에 가면 - 전동균   

부처를 모신

대웅전에 가지 않는다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석탑을 보지 않는다

영험 많은 산신각 문고리도 잡지 않는다

 

삼천사에 가면 나는

슬픔을 품듯

허공을 안고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풍경 소리

경문(經文)처럼 마음에 새기며

대웅전 지나

산신각 지나

 

그늘진 뒤안 요사채 맨 끝 방

섬돌에 놓인

흰 고무신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 벗어둔 지 오래된 듯

빗물 고여 있고 먼지도 쌓여 있는

그 고무신을 한참 보고 있으면

뚝,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

내 이마를 서늘하게 때리며 지나가고 (아, 아픈 한 생이 지나가고)

 

가끔은

담 밑 구멍을 들락거리는 산쥐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전생의 제 모습을 기억한다는 듯 * 

 

* 초승달 아래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내려,

강릉場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그락거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

 

* 몇 줌 시린 햇볕에도
지난밤 바람이 몹시 불더니, 하느님이 다녀가셨는가?
옆집에 마실 오듯 슬쩍 다녀가셨는가?

이파리들 다 떨구고
차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떠꺼머리총각처럼 서 있는 저 감나무
몇 줌 시린 햇볕에도
한없이 떨며 깊어지는
극빈의 그늘 속에

새소리, 새소리들
발목 붉은 새 울음소리들
이 세상을 다 가진 듯 맑고 높게
반짝이고 있으니

이런 날 내 공부는
경전이고 나발이고 읽던 책 탁 덮고
밖으로 나가
빨랫줄에 빨래를 널거나 마당을 쓸거나 아니면 빈둥빈둥 구름을 쳐다보며
눈 밑 점이 이쁜
한 사람을 생각하거나! *

 

* 까막눈 하느님

해도 안 뜬 새벽부터

산비탈 밭에 나와 이슬 털며 깨단 묶는

회촌마을 강씨 영감

성경 한 줄 못 읽는 까막눈이지만

주일이면 새 옷 갈아입고

경운기 몰고

시오리 밖 흥업공소에 미사 드리러 간다네

꾸벅꾸벅 졸다 깨다

미사 끝나면

사거리 옴팍집 손두부 막걸리를

하느님께 올린다네

아직은 쓸 만한 몸뚱아리

농투성이 하느님께 한 잔

만득이 외아들 시퍼런 못물 속으로 데리고 간

똥강아지 하느님께 한 잔

모 심을땐 참꽃같고

추수할 땐 개좆같은

세상에게도 한 잔.....

그러다가 투덜투덜 투덜대는

경운기 짐칸에 실려

돌아온다네 *

 

* 얼음폭포 근처
눈 맞으며 서서 죽는 나무들을 보았네
한겨울 가리왕산 얼음폭포 근처

어떤 나무들은
무릎 꿇고
얼어붙은 땅에 더운 숨을 불어넣듯
맨얼굴 부비고 있었네

얼마나 더 싸우고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지복(至福)의 저 풍경 속에 가 닿을 수 있을지

나는 신발 끈을 묶는 척 돌아서서
눈물 훔치고는
이빨을 꽉 물고 내려왔네

빈방에 속옷 빨래들이 널려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

 

* 물소리에 기대어
눈 쌓인 얼음의 골짜기 아래로
흘러가는 찬 물소리

어쩌면 내 삶은
말 못 하는 짐승 같은 것으로 다시
태어날지 몰라, 중얼거리면서

속이 훤히 비치는 물소리에 기대어
마음은 오래된 흙처럼
착해지고
떨어진 황혼의 깃털 하나에도
절하고 싶은 것을 *

 

* 나뭇가지를 꼭 쥐고

쏘내기 퍼붓듯 쏟아지는

만개의 꽃빛들보다도

이 꽃빛들을 안고

새로 나온 푸른 이파리들보다도

그 뒤에 숨어 있는

뒤틀리고 구부러진 나뭇가지들에게

더 자주 눈길 건너가고

가슴 먹먹해지나니

이 서러운 묵언(默言)의 나뭇가지들 꼭 쥐고

어루만지나니 그 누구의

몸인 듯 마음인 듯 *

 

* 들꽃 한 송이에도
떠나가는 것들을 위하여 저녁 들판에는
흰 연기 자욱하게 피어 오르니

누군가 낯선 마을을 지나가며
문득, 밥 타는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춘 채 오랫동안 고개 숙이리라

길 가에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도 *

 

* 타고난 사랑
2006년 10월 21일 12시 44분
토지문화관 앞 회촌 종점을 막 출발한 버스가 야트막한 고갯길을 굽어 돌다가 갑자기 끼익, 급정거를 하고는 꼼짝을 않고

한참이나 서 있습니다

산뱀이 길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며 *

 

* 어떤 손을 생각하며
백련산 밑 공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길

숲길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저물녘이면 울음을 참듯

고개 숙인 나무들 아래
默言修行하는 스님들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쳐올 뿐

오늘처럼

그 길 앞에 서성이다 서성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늦도록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를 받아주던 어떤 손을 생각하며
홈통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도
소주잔을 건네는 것이다 *

 

* 파문

백로(白露) 며칠 지나
점점 여물어 가는 계곡 물 위에
나뭇잎 한 장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 흘러가던 물은
젖 먹는 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려
나뭇잎이 품고 있던 하늘과
나뭇잎에 새겨진 천둥과 빗줄기와
수많은 音色으로 반짝이던 고요마저
한꺼번에 빨아들이고,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산 아래로 내려가고

  

물이 떠난 자리에 물소리 남아 있듯
오랫동안 떨며 지워지지 않는
나뭇잎의 파문
그 속에는 세상을 떠돌던 한 사람이 쪼그려 앉아
ㅡ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와 있구나
낯선 짐승 같기만 한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

 

* 절  
절을 올린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 위해
흰 벽을 마주 보고
땀 젖은 몸을 굽혔다 세우다 하다 보면
나는 나에게 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을 믿지 못하고
내 영(靈)과 혼(魂)은 자꾸 나를 떠나려고 하니
내 속의 어떤 절을 향해 무릎 꿇고
공양을 올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서럽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두렵고
이미 죽은 자의 영혼이 그립고 그리워서
무릎이 잘 굽혀지지 않는데
찬 마룻바닥에 댄 이마가
잘 떼어지지 않는데
누구일까, 어느새 내 곁에서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보다 더 공손하게 절을 올리는
저 사람은
 
* 함허동천(涵虛洞天)에서 오래 서성이다 
으슬으슬한
저녁답, 가랑잎 부서지는 소리가
자꾸 발밑에서 들렸네

어두워지기 전에 강물은
푸른 회초리처럼 휘어졌다가
흉터 많은 내 이마를 후려치고
아까보다는 훨씬 더 깊어져
불빛도 안 켜진 사람의 마을 쪽으로
그렁그렁 흘러갔네

ㅡ내 눈에는 왜 모래알이
서걱이는지 몰라, 눈을 뜰 때마다
눈 못 뜨게 매운 연기가
어디서 차오르는지 몰라

잘못 살아왔다고, 너무
아프게 자책하지 말라고
갈 곳 없는 새들은
물에 잠긴 옛집 나무 그림자를 흔들며
석유곤로에 냄비밥을 안치는
독거(獨居)의 마음속으로 떼지어 날아들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녁답, 나는
집에 안 가려 떼를 쓰는
새끼염소나 달래면서 *
 
* 댓잎들의 폭설
눈 쌓인 금장리 참대밭 
   
휘어져, 한껏 
휘어져 
마침내 세상 밖으로 탈주할 것 같은 
저 팽팽한 떨림 속에 
   
휙 
새 한 마리 지나가자   
순간, 있는 힘 다해 
눈을 터는 댓잎들 
   
제 몸을 때리며 
시퍼렇게 멍든 제 몸을 
제가 때리며 
참회하듯 눈을 터는 댓잎들은 
   
어찌 저리 맑은 빛을 내뿜는지 
어찌 저리 곧은 생을 부르는지 
   
속수무책, 나는 
갈 곳 없는 죄인이다 *
 
* 고운사 뒷숲 
작은 길 옆에는 아름드리 굴참나무 한 그루 있는데요 콸콸 쏟아지는 계곡 물소리에 온갖 나무들이 햇잎을 가득 피워올릴 때도
이 나무는 힘없이 가지를 내린 채 서 있는데요 너무 늙은 탓일까요? 시커멓게 썩어 가는 옆구리엔 영혼이 빠져나간 흔적처럼 움푹, 구멍이 패어 있는데요 참 이상한 일이지요 이 나무 옆을 지날 때마다 나는 으스스 으스스 몸을 떨며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순식간에 잊어버립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걸음을 멈추고 텅 빈 나무구멍을 오래오래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는 햇빛 좋은 날의 푸르디푸른 강물 같기도 하고 한밤중 굿당의 장고 소리 같기도 하고 눈도 못 뜬 새끼 강아지의 낑낑대는 울음 같기도 한 연기가 흘러나오는데요 그 연기 자락 끝에는 참척의 슬픔을 안고 엎드려 재를 올리는 노인네와 그 옆에 앉아 사탕을 입에 물고
두리번대는 아이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지기도 하는데요
 
* 매화, 흰빛들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
* 전동균시집[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

 

* 전동균 시인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6년 [소설문학]신인상 당선 1998년 서라벌 문학상, 1986년 소설문학사 신인상 수상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거룩한 허기].....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동주 시 모음  (0) 2010.08.20
김경미 시 모음  (0) 2010.08.20
허형만 시 모음  (0) 2010.08.13
노향림 시 모음  (0) 2010.08.11
신현정 시 모음  (0) 201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