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경미 시 모음

효림♡ 2010. 8. 20. 13:26

*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 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 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 야채사(野菜史)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

 

* 쓸쓸함에 대하여 -비망록  
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

 

* 나의 서역 -비망록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


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서역이리니 *

 

* 봄, 무량사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살의 기타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

* 김경미시집[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창비

 

흑앵
크고 위대한 일을 해낼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을 오늘의 운동이라친다
저 먼 사바나 초원에서 온 비와 알래
스카를 닮은
흰 구름떼를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뿌리 질긴 성격을 머리카락처럼 아주 조금 다듬었음을
오늘의 건축이라 친다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고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한겹씩 흑백의 필름통을 감는 나무들은 다 사진 찍어두었을 거다
신록답지 못했던 그 사진들 없애려
나뭇잎마다
한 장 한 장 치마처럼 들춰본 추억을
오늘의 범죄라 친다
없애고도 산뜻해지지 않은 이 나날의 해와 달을
오늘의 감옥이라 친다
 
노란무늬 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난 눈을 검정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나뭇잎 속의 사진을 당신으로 쳐주고 싶지는 않아도
 
종일 사로잡힌 오늘 하루의 그리움을
위대함이라 친다 * 
* [시안]-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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