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종길 시 모음

효림♡ 2010. 8. 20. 13:28

* 소 - 김종길   
네 커다란 검은 눈에는
슬픈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 속에 내가 있고나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

때로 지그시 눈을 감는 버릇을
너와 더불어
오래 익히었고나 *

 

* 여울 
여울을 건넌다.


풀잎에 아침이 켜드는
개학날 오르막길,

여울물 한 번
몸에 닿아보지도 못한
여름을 보내고,

모래밭처럼 찌던
시가(市街)를 벗어나,

길경(桔梗)꽃 빛 구월의 기류(氣流)를 건너면,


은피라미떼
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

아침 풀벌레 소리. *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 가을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

 

* 주점일모(酒店日暮) 
불빛 노을
이제 쇠처럼 식어가고

황량한 나의 청춘의 일모(日暮)를
어디메 한구석
비가 내리는데
맨드라미마냥 달아오른 입술이
연거퍼 들이키는 서느런 막걸리

진실로 나의 젊음의 보람이
한잔 막걸리에 다했을 바에

내 또 무엇을
악착하고 회한하고 초조하랴 ㅡ
무수히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며
창연한 노을 속에
내 다시 거리로 나선다 *

 

* 흰꽃  
여기는 지금 초여름
그 흔해빠진 아카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찔레며 조팝나무며 이팝나무
그리고 이웃집 담장 안의 불두화까지

모두들 녹음을 배경하여
흰 꽃을 소담하게 피웠다가
더러는 벌써 지기 시작하네

흰 꽃은 늙은이들
또는 죽은 이들에 어울리는 꽃
올해는 나 혼자 이곳에 남아

그 꽃을
보네 *

 

* 자전거

내리막길에는 가속(加速)이 붙는다
발은 페달에 올려놓으면 된다

 

그러나 균형은 잡아야 한다
무엇이 갑자기 뛰어들지도 모른다
그런 뜻하지 않은 일에도 대비해야지

 

그런데도 그런대로 편안한 내리막길
바퀴살에 부서져 튕기는 햇살
찌렁찌렁 울리는 방울

 

언덕길 밑바지에선 해가 저물고
결국은, 결국은 쓰러질 줄 알면서도
관성(慣性)에 몸을 실어, 제법 상쾌하게

가을 석양(夕陽)의 언덕길을 굴러내려간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면서
지그시 브레이크도 걸어보면서 *
 

 

* 춘니(春泥)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정구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

 

* 겨울 숲에서 

붉은빛을 머금은
은은한 금빛!
늦가을 숲 속 나무들은
박물관에 진열된 금동불상들
불상들에게도 육탈이 있는 건지
그것들은 지금 뼈와 실핏줄을
부챗살처럼 무수히
추운 하늘에 펼치고 있다
허나 머지않아
그것들은 다시 살이 찌리라
신록이 금빛으로 눈부실
회춘의 그날! *

 

* 경이로운 나날

경이로울 것이라곤 없는 시대에
나는 요즈음 아침마다
경이와 마주치고 있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창밖 화단의 장미포기엔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이 영글고,


산책길 길가 소나무엔
새 순이 손에 잡힐 듯
쑥쑥 자라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항다반으로 보는
이런 것들에 왜 나의 눈길은 새삼 쏠리는가.
세상에 신기할 것이라곤 별로 없는 나이인데도. *

* 하회에서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河回)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養眞堂) 늙은 종손의 기침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西厓)대감 구택 충효당(忠孝堂) 뒤뜰,
몇 그루 모과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중인
유물전시관 건축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국성된다. *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 꽃밭

말없이

간절한 목숨들이 고개 들고 있는 곳//

아 한여름 개인 오전(午前)을,//

저마다의 꽃다움을 뽐내듯,

또는 수줍어하듯,

열정적으로,

또는 소담하게,

또는 애처롭게,//

저마다의 선명한 빛깔과 모양과 몸짓을 지니고,//

혹은 한 포기 외로이,

혹은 몇 포기씩 정다웁게,

한결같이 밝고, 아름답고, 싱싱하게,//

모두 다 실상 멋있게,

혹은 며칠을

혹은 하루 만에,

시새우듯,

겨루듯 피었다가 눈물도 없이 가버릴 것들, 꽃, 꽃, 꽃들.//

잠시 못 견딜 부러움으로

황홀히 바라다본,//

아 그것은 눈부신 교향악(交響樂), 그 한 분절에,

사실은 하잘것없는 나의 관조(觀照)의 한 분절에.//

외출하기 전 짐짓 웃음지으며,

너에게 흰 모자를 벗어든다.//

꽃밭.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중앙

 

* 김종길(金宗吉) 시인

-1926년 경북 안동 사람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05년 이육사 시 문학상,  2007년 청마문학상 수상

-시집 [성탄제] [황사현상][해가 많이 잛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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