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신달자 시 모음

효림♡ 2010. 8. 24. 08:02

* 아가(雅歌) 6 - 신달자  

해가 저물고 밤이 왔다

그러나 그대여

우리의 밤은 어둡지 않구나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어둠은

물처럼 부드럽게 풀려

잘 닦은 거울처럼

앞뒤로 걸려 있거니

그대의 떨리는 눈썹 한 가닥

가깝게 보이누나

밝은 어둠 속에

잠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나는 글을 쓴다

첫장에 눈부신 그대 이름

절로 밝아 오는 하나의 등불

내 생(生)의 찬란한 꽃등이 켜진다 *

 

* 너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에
울음을 참아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부를수록
너는 멀리 있고
내 울음은 깊어만 간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

 

메주
날콩을 끓이고 끓여
푹 익혀서
밟고 짓이기고 으깨고
문드러진 모습으로
한 덩이가 되어 붙는 사랑
다시는 혼자가 되어 콩이 될 수 없는
집단의 정으로 유입되는
저 혼신의 정 덩어리
으깨지고 문드러진 몸으로
다시 익고 익어
오랜 맛으로 퍼져가는
어설프고 못나고 냄새나는
한국의 얼굴
우리는 엉켜버렸다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실 날로 서로 엉켜
네 살인지 내 살인지
떼어내기 어려운 동질성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내가 아프면 네가 아픈
그래서 더는 날콩으로 돌아갈 수 없는
발효의 하얀 금줄의 맛
분장과 장식을 모두 버리고
콧대마저 문지른 다음에야
바닥에서 높고 깊은 울림으로
온몸으로 오는 성(聖)의 말씀 하나 *
* 신달자시집[오래 말하는 사이]-민음

 

* 열애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잘 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밴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가겠다 

피흘리는 사랑도 며칠은 잘 나가겠다 
내 몸에 그런 흉터많아 
상처 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려 
고질병 류마치스 손가락 통증도 심해 
오늘밤 그 통증과 엎치락 뒤치락 뒹굴겠다 
연인몫을 하겠다 
입술 꼭꼭 물어뜯어 
내 사랑의 입 툭 터지고 허물어져 
누가 봐도 나 열애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작살나겠다 *

 

* 불행 
내던지지 마라
박살난다
잘 주무르면
그것도 옥이 되리니 *

 

* 소
사나운 소 한 마리 몰고
여기까지 왔다
소몰이 끈이 너덜너덜 닳았다
골짝마다 난장 쳤다
손목 휘어지도록 잡아끌고 왔다
뿔이 허공을 치받을 때마다
뼈가 패었다
마음의 뿌리가 잘린 채 다 드러났다
징그럽게 뒤틀리고 꼬였다
생을 패대기쳤다
세월이 소의 귀싸대기를 때려 부렀나
쭈그러진 살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넝마 같다
핏발 가신 눈 꿈벅이며 이제사 졸리는가
쉬!
잠들라 운명 *

 

* 사모곡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 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 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 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 

 

* 네가 눈뜨는 새벽에  

네가 눈뜨는 새벽

숲은 밤새 품었던 새를 날려

내 이마에

빛을 물어다 놓는다

우리 꿈을 지키던

뜰에 나무들 바람과 속삭여

내 귀에 맑은 종소리 울리니

네가 눈뜨는 시각을 내가 안다

그리고 나에게 아침이 오지

어디서 우리가 잠들더라도

너는 내 꿈의 중심에

거리도 없이 다가와서

눈뜨는 새벽의 눈물겨움

다 어루만지니

모두 태양이 뜨기 전의 일이다

 

* 화장
속이 비었나봐
화장이 진해지는 오늘이다

 
결국은 지워 버릴 속기(俗氣)이지만
마음이 비어서 흔들리는
가장 낮은 곳에 누운 바람이

붉은 연지로
꽃이 핀다
아이섀도의 파아란
물새로 날아 오른다

안으로 안으로 삭이고만 살던
여자의 분냄새
여자의 살냄새
대문 밖을 철철 흘러나가
삽시간 온 마을 소문의 홍수로
잠길지라도


진해버려
진해버려
쥐 잡아 먹은 듯
그 입술에 불을 놓아 버려

결국은

색과 향이 있는
대담한 사생활은
그저 이것 하나뿐

 

* 봄의 금기 사항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 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서로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

* 신달자시집[오래 말하는 사이]-민음

* 개나리꽃 핀다

바람 부는 3월
진회색 개나리 가지들 속에서
노오란 머리 비집고 나오는
신생아들
순금의 애기부처들이
지난해 못다 준 말씀을
세상에 와르르 쏟아내고 계시다
온 몸으로 순금의 등을 켜고
거리에 순금의 자비를 내리신다
화가 잔뜩 난 사람들 여기를 봐라
하늘의 선물로 내린 빛의 아기들
세상을 순화시키려고
거리마다 신생아실을 짓는다
절하라
거기가 어디든 모두 법당 안이다
아기부처들을 태운 황금열차가
세상의 거리를 달려간다
3월 설법으로
개나리꽃 핀다

 

* 4월의 꽃  

홀로 피는 꽃은 그저 꽃이지만

와르르 몰려

숨넘어가듯

엉겨 피어 쌓는 저 사건 뭉치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 철쭉들

저 집합의 무리는

그저 꽃이 아니다

우루루 몰려 몰려

뜻 맞추어 무슨 결의라도 하듯이

그래 좋다 한마음으로 왁자히

필 때까지 피어보는

서럽고 억울한 4월의 혼령들

잠시 이승에 불러 모아

한번은 화끈하게

환생의 잔치를 베풀게 하는

신이 벌이는 4월의 이벤트 *

* 신달자시집[오래 말하는 사이]-민음

* 나의 사랑  

드디어 한 조각으로 남아

여기 걸렸구나 

 

마음에서 떠나 보내면

저승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이승의 허공에 깃발로 걸려

찢어지더라도 눈물 없이 우는 법

여기서 익히고 있구나 

 

바람아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라

한 여자의 심장이 거기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저

깃발 하나 있다고 말하리니 

 

저승 밖에 끌어내지 못했으면

허공에 있어도

내 가슴에 있는 것

이제는 단념이란 말

저승으로 보내고 

 

이 땅에 더 깊은 뿌리로 선

이 땅에 더 높은 기둥에 몸을 묶은

나의 목숨

이 나의 사랑

 

* 눈썹 달 
어느 한(恨) 많은 여자의 눈썹 하나
다시 무슨 일로 흰 기러기로 떠오르나
육신은 허물어져 물로 흘러
어느 뿌리로 스며들어 완연 흔적 없을 때
일생 눈물 가깝던 눈썹 하나
영영 썩지 못하고 저렇듯 날카롭게
겨울 하늘에 걸리는가
서릿발 묻은 장도(粧刀) 같구나
한이 진하면 죽음을 넘어
눈썹 하나로도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 누구도 못 풀 물음표 하나를
하늘 높이에서 떨구고 마는
내 어머니 짜디짠 눈물 그림자 *

 

* 등잔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 신달자(愼達子) 시인

-194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1972년 현대문학 [발][처음 목소리]등단, 2007년 현대불교문학상 2008년 영랑시문학상 수상 

- 시집 [아가(雅歌)][백치슬픔][오래 말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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