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젊은 시 모음 1

효림♡ 2010. 9. 10. 08:05

* 패랭이 꽃 - 이승희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꽃잎마다 살림을 차리고 살지,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들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간다지
저이들을 봐,
꽃잎들의 몸을 열고 닫은 싸리문 사이로 샘물 같은 웃음과 길 끝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이잖아, 해 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복(福)자 새겨진 밥그릇을 앞에 둔 가장의 모습, 얼마나 늠름하신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  

* 이승희시집[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 낙수 -조정인 
느리게 구르던 수차가 덜컹, 깊은 바퀴자국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동안 이곳은 늪지입니다

전선에 맺힌 빗방울 하나가, 제게 다가오는 때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수밀도 익어가듯 깊어갑니다 말갛게 바닥을 탐색하던 빗방울이
깜박, 저를 놓으며 온몸에 찰나의 광휘를 둘렀습니다


빗방울이 제 자릴 찾는 데는 삼천년이 걸린다는데 삼천년 너머
빗방울 하나가 허공에 떨고 있었을 그날에도

하늘은 저리 푸르렀을까요?


연일 소소한 바람이 많아진 비 개인 오후, 흰 종이 위에
ㅡ종일 나뭇잎이 웅성거린다고 적어봅니다, 깊어진 여백으로
물푸레나무가 들어섭니다 다 셀 수 없는 마음입니다 *

 

* 南으로 창을 내겠소 - 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 김용택시인[시가 내게로 왔다]

 

* 형제 - 김준태 
초등학교 1, 2학년 애들이려나
광주시 연제동 연꽃마을 목욕탕
키가 큰 여덟 살쯤의 형이란 녀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섯 살쯤 아우를
때밀이용 베드 위에 벌러덩 눕혀놓고서
엉덩이, 어깨, 발바닥, 배, 사타구니 구석까지
손을 넣어 마치 그의 어미처럼 닦아 주고 있었다
불알 두 쪽도 예쁘게 반짝반짝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게 보기에도 영 좋아 오래도록 바라보던 나는
"형제여! 늙어 죽는 날까지 서로 그렇게 살아라!"
중얼거려주다가 갑자기 눈물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

 

* 숟가락 - 장석남 

가루 커피를 타며 무심히 수저통에서 제일 작은 것이라
고 뽑아들어 커피를 젓고 있는데 가만 보니 아이 밥숟가락
이다 그 숟가락으로 일부러 않던 버릇처럼 커피를 홀짝 떠
삼킨다
단가 쓴가
가슴이 뻐근하다
빈집에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발치에 와 있는 햇빛
커피 한잔 주고 싶다 *

 

* 졸음 - 황인숙 
달팽이 시내를 건너갑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너갑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너갑니다
달팽이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유리창 위의 달팽이 한 마리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

 

* 전어와 달빛 - 윤상운

전어 한 쌈에
달빛 한 쌈
작년에 떠났던 가을
파도에 실려 돌아오네
가족들 모두 병이 없으니
떠난 것들 생각에 밤이 깊어도 좋으리
창 밖에
먼 곳 풀벌레 가까이 다가오누나 *

 

* 그리움엔 길이 없어 - 박태일 
그리움엔 길이 없어
온 하루 재갈매기 하늘 너비를 재는 날
그대 돌아오라 자란자란
물소리 감고
홀로 주저앉은 둑길 한 끝 *

 

* 西向 - 이규리

내 몸이 너무 가늘어 그 사람 숨겨 둘 데 없습니다

혼자 바라보는 저녁 산에 소름이 돋고

오래 바라보다 꿈쩍 않는 산 하나 옮깁니다

사람과 이별하는 일은 그렇게 자리를 바꾸는 일이지요

동서남북을 죄다 흔드는 거지요

말을 줄이는 일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내 야윈 겨드랑이를 몇 알 열매가 붙잡고 있습니다 *

* 이규리시집[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 가을편지 - 조사익

사람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때로는 감정을 촉촉이 적셔 주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자연이 나에게 보내온 사계절이 그렇고
나무가 피워 낸 꽃들이 그렇습니다

화실 캔버스 앞에서 흰 공간을 채우지 못할 때는
사계절과 나무, 그리고 꽃을 생각했습니다
원고지를 펼쳐 놓고 마음에 담아 둔 이야기를 끄집어 내지 못할 때는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그렇듯이 오늘도 나의 하루는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모든 것에 에워 쌓인 하루였습니다
신문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읽고
텔레비전에서 보고 싶은 얼굴 만나고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까지 들으며 지냈는데  
그래도 또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기에 외로운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생각으로 그린 그림을 눈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감정으로 빚은 꽃향기를 코로 맡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노래를 귀로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대신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행복했습니다
만났던 친구들의 아름다운 시를 읽었습니다
통성명은 없었어도 또 친구들의 고귀한 시를 읽었습니다

오늘 눈앞에 잡다한 병원 기록을 보면서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답고 따듯한 미소
정 가득, 향기나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 모두에게 *

 

* 최첨단 - 문인수 
그래, 그것은 어느 순간 죽는 자의 몫이겠다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꽃이 피거나 말거나, 시들거나 말거나
또 하루가 갔다
한 삽 한 삽 퍼 던져
이제 막 무덤을 다 지은 흙처럼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룩 묻혀 버린 허공처럼

하루가 갔다. 그러고 보니 참 송곳 끝 같은 이 느낌, 또 어이 싹뜨는 미물같다.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첨예하다
저 어둠을 뚫고 또 어디, 싹트는 미물이 있겠다 *

 

* 꽃나무 - 이상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 열심으로

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 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런흉내를내었소 * 

 

* 세월 - 이준규   

가슴에 병이 나서 커튼과 재와 구름이 날리고

하늘을 물들이는 잠자리 떼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몰락의 기운

나는 하루 종일 병든 소파에 누워 있다

매미의 계절은 가고

알 수 없는 질투

나의 정면과 나의 배면에서 일제히 바람이 분다

그럼 매미는 울었고 나는 슬펐다

보다 더 진지해지자

단어들이 장악한 낭만

표면만 있는 심연

그러고도 웃을 수 있을까

양버즘나무가 누추한 옷을 벗고 다시 입고

눈은 쌓이고 비는 지나가고

구름 사이로 숨은 비참한 태양은 붉은

강물의 자맥질을 시인하고

서러운 똥물 답답한 죽음

언덕 위에서 우리는 키스 없이 헤어졌다

각자의 없는 삶을 향해 걸었지

전철역의 입구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각자 빗속에서 처참했다

해가 지다

해가 뜨다

아 저 개 좋다

나보다 비싸겠다 *  

* 이준규시집[흑백]-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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