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장철문 시 모음

효림♡ 2010. 9. 13. 08:00

* 길갓집 - 장철문  
처마 밑에 빗방울들이 물잠자리 눈알처럼 오종종하다
들녘 한쪽이 노랗다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세 그루
빗방울 몇이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남은 물방울들이 파르르 떤다
은행잎이 젖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툭
떨어져 내린다
반나마 깔려서 들녘 한쪽을 다 덮었다 *

 

*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 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인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가?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 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바칠 수 없는 것들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

 

* 신혼 
아내의 몸에 대한 신비가 사라지면서
그 몸의 내력이 오히려 애틋하다

그녀의 뒤척임과 치마 스적임과
그릇 부시는 소리가
먼 생을 스치는 것 같다

얼굴과 가슴과 허벅지께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오래 전에
내 가슴께를 스적인 것이 만져진다

그녀의 도두룩하게 파인
속살 주름에는
사람의 딸로 살아온 내력이 슬프다

우리가 같이 살자고 한 것이
언젠가 *

 

* 거기 가 쉬고 싶다
그대 영혼의 아름다운 빈터
거기
바람 설레는데
터잡을 데 없는 씨앗들 와서
떡잎 틔우고 꽃 피우는데
도둑제비 쉬어가고
바랭이 쇠비름 욱은 데
거기
부엉이 낮에 울고
풀무치 날고 패랭이 꽃 피는데 *

 

* 어머니에게 가는 길
아이가 지하철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어머니는 손수건을 들고
입가에 소스가 묻을 때마다 닦아낸다
아이는 햄버거를 먹는 것이 세상 일의 전부다
어머니는 침 한번 삼키는 일 없이
마냥 성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얼굴이다

어머니는 저 성스러운 것에 이끌려
무화과같이 말라간다
모든 성스러운 것은 착취자들이다 *

 

* 모자 
장모님이 새 자전거를 샀다고 모자를 선물로 보내셨다
늦은 술자리에서 돌아와
헐렁한 생활한복에 모자를 쓰고
각설이 흉내를 낸다

어릴 때 꿈 중에는 승려와 거지도 있었다 *

 

* 개구리

저 놈의 목탁소리!

 

무슨 고통을 벗느라

저리

살목탁을 치나

 

무슨 서원(誓願)이

한밤을

떠메고 가나

 

마르고 닳도록 쳐도 깨지지 않는

목탁

 

어느 천년에

떼 울음 적정(寂靜)에 닿아서

한밤을 비우고 가나 *

 

* 가을 텃밭의 추격전
수메뚜기가 암메뚜기를 들쳐 업고 딱딱한 아래턱으로 배춧잎을 푹푹 갉아먹는다. 이 배추가 누 배추라고! 할머니가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오던 그 저물녘의 쇠죽 아궁이가 불쑥 밀고 올라온다. 저 놈, 저 놈, 저 처죽일 놈! 부지깽이는캥이나 썩은 지줏대 하나 뒹굴지 않는 배추이랑을 맨손바닥으로 하나 치켜들고 쫓아간다. 그냥 불알을 톡 까놓을라, 이 망할 놈! 쫓아오던 할머니가 뚝 멈춰서서 사내처럼 껄껄껄껄 웃었다. 나도 건너편 무우 두럭으로 풀쩍 기우뚱 토끼는 놈을 향해 냅다 뛰어 헛손질을 하다가는 뒤쪽 허공에서 난데없이 손이 쑥 나와 어깨라도 감싸안고 당기는 듯 멈춰서서는, 불알을 톡 까놓을라, 이놈! 하늘에 낮달이 비긋이 웃는 그때를, 그것도 은폐라고 무우 이파리 뒤로 딱 붙은 채 뒤뚱 팔랑 돌아가 붙는 년놈. 참 이쁜!

 

* 무릎위의 자작나무

자작나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돋아나고 있다, 가슴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한번도 채우지 못한 
목마름의 샘을 
자작나무가 틔우고 있다 

자작나무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를 보고 있다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낳고 있다 

구겨져서 납작하게 눌린 나무가 
잎사귀에 피어서 
주름들이 지워지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
장철문시집[무릎 위의 자작나무]-창비

 

* 단풍나무 길에 서서  
꽃잎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다 신록의 단풍잎 사이에서 와서
신록의 단풍잎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사선을 그리며
유성우(流星雨)가 떨어지고 있다
궁창(穹蒼) 속에서 와서
궁창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흙이었으며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꽃이었으며
꽃으로 돌아갔었다고 해도 좋다
햇살이
신록의 단풍나무숲을 투과하고 있다
신록의 단풍잎을 투과하고 있다
사선을 그리며 사라지고 있다
사라지는
어느 한순간도 잡을 수가 없다
지금이
사라지고 있다
궁창으로부터 궁창으로 사라지고 있다 폭우처럼 사라지고 있다
가슴으로부터 가슴으로 사라지고 있다 *
 
* 장철문시집[무릎 위의 자작나무]-창비
 

 

* 하루살이, 하루살이 떼

지랄, 지랄
저것들이 저렇게 환장하게, 육실허게 붐벼쌓는 건
살아서 좋다는 것인가
살아서 못 살겠다는 것인가
염병, 염병
저것들이 저렇게 미치게 몰켜쌓는 건
어쩌란 것인가
어떻단 것인가
오살, 오살
서산에는 막걸리 한 동이 걸판진데
바짓가랭이 타고 오르는
풀냄새
환장혈 풀냄새
어떤 여편네 와서
가슴패기 호밋날로 칵 찍어줬으면
육실, 육실
저것들이 왜 저 지랄인가
이것이 왜 이 지랄인가
이 물살
가슴물살 살물살을 어쩌자는 것인가
어쩌라는 것인가  *
* 장철문시집[산벚나무의 저녁]-창비

* 장철문(張喆文)

-1966년 전북 장수 출생

-1994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마른 풀잎의 노래]로 등단

-시집 [바람의 서쪽][산벚나무의 저녁][무릎 위의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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