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장석남 시 모음 2

효림♡ 2010. 9. 20. 08:15

* 일모(日暮) - 장석남  
저기 뒹구는 것은 돌멩이
저것은 자기 그늘을 다독이는 오동나무
저것은 어딘가를 올라가는 계단
저것은 곧 밤이 되면 보이지 않을 새털구름
그리고 저것은 근심보다 더 낮은 데로 떨어지는 태양


화평한 가운데
어디선가 새소리 짧게 들리다 만다
오늘 저녁은 새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 시장기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라일락의 집
저녁의 장독대에서 장을 푸는
그, 숟가락을 탁탁탁탁 두드리는 소리로써
탁탁탁탁탁 그 유난한 소리로써

라일락나무에 내려온 하늘을 깨워 

잎잎마다 사랑의 얼굴을 만드니
그 윤기를
내 허파와 심장에
부끄러운 이마에도 발라서
살아 봐야겠다고
저녁에 나가 아주 가늘은 달이 낮에서
저녁으로 옮겨가는 것 보고 또 저녁에서
라일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고
내 발들을 보고
발가락들을 보고
저녁에 나가 라일락나무 속으로
할머니, 향기들을 거두어 걸어 들어가는 것 보고
꽃 다 빈 것 보고
또 발등을 보고
발등 위 흙 보고 *

 

* 새로 생긴 저녁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난(蘭)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돌돌 말아

가슴에 넣어 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 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 장석남시집[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 그 라일락 밑에는  

그 라일락 밑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산다

한해살이풀들과 깨진 벽돌 조각, 지나가는 사람들

이 흘린 밤과 밀담과 욕지거리들이

부모 없는 아이들처럼 서로 다른 원색의 남루를 입고서

라일락이 주는 그늘로만 집도 하고

먹이도 하고 이얘기도 하고

때로 개 오줌을 맞으며

산다

 

내 자주 가보는

그 라일락 밑에는 돌멩이들이

숨이 차서 간 때는 밭은 기침들이 되어서 살고

고단해서 가는 때는 스님이 되어서 살고

연인이 되어보자고 가는 때는 꼭 계곡처럼 산다

목이 쉬어서

 

헌데 이상하기도 하지

이상하기도 하지

그 향기

이상하기도 하지

한결같이

한결같이

 

*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 인연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오 그래,

네 젖은 눈 속 저 멀리

언덕도 넘어서

달빛들이

조심조심 하관(下棺)하듯 손아귀를 풀어

내려놓은

그 길가에서

오 그래,

거기에서


파꽃이 피듯

파꽃이 피듯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뻐꾸기 소리
깜빡
낮잠 깨어나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 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꽃빛만 같이

사랑도 꼭 그만큼쯤에서
그 빛깔만 같이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가까이 와  

초여름 이슬비는
이쯤 가까이 와
감꽃 떨어지는 감나무 그림자도
이쯤 가까이 와

가끔씩 어깨 부딪치며 천천히 걷는 연인들
바라보면 서로가 간절히
가까이 와
손 붙잡지 못해도
손이 손 뒤에 다가가다 멈추긴 해도
그 사이가
안 보이는 꽃이니, 드넓은 바다이니
휘어진 해변의 파도 소리
파도 소리

뉘우칠 일 있을 때 있더라도
새 연애는
꽃 진 자리에 초록이 밀리듯이 서로
가까이 좀 와
아무도 모르게
초여름 늦게 오는 저녁도
저녁 어둠이 훤하긴 하더라도
그 속에서 서로
이쯤 가까이 와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격렬비열도 
드뷔시의
기상 개황 시간
나는 튓마루 끝에 앉아서
파고 이 내지 삼 미터에
귀를 씻고 있다
만경창파(萬頃蒼波)
노을에
말을 삼킨
발자국이 나 있다
술 마시러 갔을까
너 어디 갔니
로케트 건전지 위에 결박 지은
금성 라디오
한번 때려 끄고
허리를 돌려
등뼈를 푼다
가고 싶은
격렬비열도
(요즘 라라 크래커는 왜 안 나오지?) *

 

*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

 

*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천수천안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

* 장석남시집[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 낮은 목소리  

더 작은 목소리로
더 낮은 목소리로, 안 들려
더 작은 목소리로, 안들려, 들리질 않아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
라일락 같은 소리로
모래 같은 소리로
풀잎으로 풀잎으로
모래로 모래로
바가지로 바가지로
숟가락으로 말해줘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
내 사랑, 더 낮은 소리로 말해줘
나의 귀는 좁고
나의 감정은 좁고
나의 꿈은 옹색해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너의 목소린 너무 크고 크다
더더 낮고 작은 목소리로 들려줘
저 폭포와 같은 소리로, 천둥으로,
그 소리로 *

* 문태준엮음[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

 

* 石榴나무 곁을 지날 때는 

지난 봄에는 石榴나무나 한 그루

심어 기르자고, 봄을 이겼다

내년에나 보리라 한 꽃이 문득 잎사귀 사이를 스며 나오고는 해서

그 옆을 함부로 앉기 미안하였다

꽃 아래는 모두 낭자한 빛으로 흘러 어디 담아둘 수 없는 것이 아깝기도 했음을,

그 욕심이, 내 숨결에도 지장을 좀 주었을 듯

 

그 중 다섯이 열매가 되었는데,

열매는 내 드나드는 쪽으로 가시 달린 가지들을 조금씩 휘어 내리는 게 아닌가

그래 어느 날부터인가 석류나무 곁을 지날 때에는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중 하나가 깨어진 채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 안팎을 다해서 저렇게 깨어진 뒤라야 완성이라는 것이, 위안인, 아침이었다

그 곁을 지나며 옷깃을 여미는 자세였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었으니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을 생각해보는 아침이었다

* 겨울 저녁에 

어느 하느님이 온다는 것인가

무슨 젊음을 이제는 저토록 높고 소슬히 이겨냈다는 것인가

저 빈 겨울 감나무

아이들의 입으로도, 늙은이의 잇몸으로도 들어가고 남은 허공들에

그 동안은 못 보던 하늘, 못 듣던 바람 소리 두루 맑게 갖추는, 그 아래에 나도

저녁을 부르며 섰다 *

* 장석남시집[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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