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성우 시 모음

효림♡ 2010. 9. 28. 11:35

* 거미 -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 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박성우시집[거미]-창비

* 굴비

노인은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편지함에서 떨어진 우편물처럼
마당 바깥쪽에 낮게 엎드린 노인은
왼팔의 극히 일부만을
파란 대문 안쪽에 들여놓은 채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노인의 오른팔에 쥐어진 검정봉지엔
비틀비틀 따라왔을 술병이 숨막힌 머리를 겨우 쳐들었다

처마 밑에는 누군가 보내준 굴비 한두름이
대문 틈 사이로 밀려지던 손가락을 지켜본 듯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내려온 핏줄들이 술렁이는 동안
노인은 마당 밖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다
집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노인 옆에 있던 무전기가 반복해서 말했다

부검된 노인이 방안으로 옮겨지기 전부터
흑백사진 앞에 나란히 뉘어지던 굴비는
뜬눈으로 조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잔치 내내 생볏짚을 먹어야 했던 암소가
트럭에 실려나간 뒤 대문이 닫혀졌고 노인처럼
헛간으로 아무렇게나 버려지던 태우다 만 목발 하나
밤마다 절름절름 빈 마당을 돌았다

조기는 굴비가 되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석쇠에서조차 눈을 치켜뜨고
세상 조여오던 그물을 온몸으로 기억해낸다 *
 

* 박성우시집[거미]-창비

* 보라, 감자꽃  

자주 보라 자주 보라
자주 감자꽃 피어 있다
일 갈 적에도
마을회관 놀러 갈 적에도
문 안 잠그고 다니는 니 어미
누가, 자식 놈 흉이라도 볼까봐
끼니때 돌아오면
대문 꼭꼭 걸어잠그고
찬밥에 물 말아 훌훌 넘기는
칠순에 닿은 니 홀어미나
자주 보라 자주 보라,
자주 감자꽃 피어 있다
어머니가 챙겨 싸준 감자
쪼글쪼글 썩혀서 버린 화단에
자주 감자꽃은 피어,
꽃핀 나 볼라 말고
쪼글쪼글 오그라드는
니 홀어미나
자주 보라 자주 보라 *

 

*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

* 박성우시집[가뜬한 잠]-창비 

 

* 강천사에서  
흙길이다  
한적한 진입로 따라  
속살 훤히 보여주는 피라미떼 
폴짝폴짝 뛰어 햇살 감아 올라간다  
물살이 거칠어서
이 길 선택했을 저 무리들은
잘 닦인 길은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
길은 넓을수록 따분하다
어느 절이었을까
아스팔트로 門 열던 그 절은
흉흉한 안팎의 소문들이 귀를 먹게 했다
극락교 지나온 사람들은
대웅전에서 합장을 한다
간절한 소원이 누구에게나 한 가지쯤은 있는 법
허나, 일찌감치 세상에 단풍든 나는
빌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냥 지나친다
내 육신 외의 것들에 대하여
손을 모아 본 적이 있었던가
운동화가 더 이상 커지지 않기 시작한 뒤에도
긴박한 속보조차
숭늉처럼 쉽게 소화시키지 않았던가
쉰내 나는 몸, 씻어 보자는 속셈인가
약수 한 대접 거뜬히 마신다
길다란 쇠줄로 연결된 구름다리를 건넌다
한발만 움직여도 흔들린다
벼랑도 마음을 닮은 걸까
올려다 볼 때보다
내려다 볼 때 더 위태롭다

 

* 청개구리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어요 

청개구리 한 마리가

내 방 창문에 따악 붙어 있었지요 

청개구리 올라온 걸 보니 

비가 많이 오려나 보네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청개구리를 떼어 내 

꽃사과나무 밑에 놓아주려 했어요 

엄청난 비바람에 떨어지면 다치니까요 

그런데 청개구리 잡으려고

바짝 다가가서 보니 

꽃사과나무 이파리였어요 *

 

* 콩나물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 올린다

 

* 초승달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 속으로 튀어 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 

 

* 보름달 

어느 애벌레가 뚫고 나갔을까
이 밤에 유일한 저 탈출구,
함께 빠져나갈 그대 뵈지 않는다 *

 

* 물의 베개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

* 박성우시집[가뜬한 잠]-창비 

 

* 입춘 윷판   

처마 끝에 걸린

낡고 오래된 풍경, 소리

쟁그랑쟁그랑 입춘을 알린다  

 

전주 한옥마을

토담길 골목 가운뎃집 마당으로

겨울 털러 온 사람들은

멍석 깔고 장작불 피워

봄이 오는 첫날 아침

입춘대길 윷판을 벌린다  

 

윷은 멍석 위로 던져지고

말은 갈팡질팡 말판을 건넌다

이겨도 별것 없는 판을 놓고

어수선한 실랑이가 벌어지니

밍밍한 구경꾼조차 간섭하여

윷판은 시끌벅적하게 흥성해진다 

 

한말 술에 묵은 김치전이 나와

윷판에서 떼를 쓰던 진안댁이

젤 먼저 술을 따라 부아난 속 달랜다

술주전자를 꿰찬 화산양반은

서너 순배 술을 어깨춤으로 돌린다

몰려온 구경꾼도

윷을 노는 사람도 입춘  

 

윷 한판에 환장을 한다 *

 

* 소금벌레 

소금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있다
머리에 흰 털 수북한 벌레 한 마리가
염전 위를 기어간다 몸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연신 소금물을 일렁인다

소금이 모자랄 때
제 눈물을 말려 먹는다는 소금벌레,
소금물에 고분고분 숨을 죽인 채
짧은 다리 분주하게 움직여
흩어진 소금을 쉬지 않고 끌어모은다
땀샘 밖으로 솟아오른 땀방울이
하얀 소금꽃 터뜨리며 마른다

소금밭이 아닌 길을 걸은 적 없다 일생 동안
소금만 갉아먹다 생을 마감한 소금벌레
땡볕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흥얼흥얼, 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으는
비금도 태산 염전의 늙은 소금벌레 여자
짠물에 절여진 세월이 쪼글쪼글하다 *

 

* 해바라기  
담 아래 심은 해바라기 피었다

참 모질게도 딱
등 돌려 옆집 마당 보고 피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말동무하듯 잔소리하러 오는
혼자 사는 옆집 할아버지 웬일인지 조용해졌다

모종하고 거름 내고 지주 세워주고는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 기다린 터에
야속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해바라기가 내려다보는 옆집 담을 넘겨다보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은
옆집 억지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등에 슬몃슬몃 손 포개면서

우리집 해바라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

 

* 오이를 씹다가 

퇴근길에 오이를 샀네
댕강댕강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 집에 첨으로 놀러 온 건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조선오이나 따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었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제를 잡는디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었네
나 는 니 가 좋 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은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왔었네
하루에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시오리 길 교회에서 받은 공책도 내게 줬었네
한번은 까치재 밤나무 아래서 밤을 까는디
수열이가 오줌 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때기에다 거시기를 해 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가네
아무리 염병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인디
고년은 뱉어도 뱉어도 뱉어지지 않네
먼놈의 오이꼭다리가 요렇코롬 쓰다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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