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윤제림 시 모음

효림♡ 2010. 9. 29. 08:48

* 사랑을 놓치다 - 윤제림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

 

* 사랑 그 눈사태 
침 한번 삼키는 소리가
그리 클 줄이야 !

설산(雪山) 무너진다, 도망쳐야겠다. *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 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

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 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 하고 제 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

"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

 

* 강가에서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

* 서정윤엮음[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이가서

 

* 어느 날인가는  

어느 날인가는 슬그머니 

산길 사십 리를 걸어내려가서 

부라보콘 하나를 사먹고 

산길 사십 리를 걸어서 돌아왔지요 

 

라디오에서 들은 어떤 스님이야긴데 

그게 끝입니다 

싱겁지요? *

 

* 가족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
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
내 옷이다. 한 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
아내가 드린 모양이다


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
내 옷이다. 한 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
빨래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가정식 백반 

아침됩니다 한밭 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

* 윤제림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 

* 윤제림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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