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조정권 시 모음

효림♡ 2010. 10. 11. 07:53

* 약리도(躍鯉圖) - 조정권   

물고기야 뛰어올라라

최초의 감동을

나는 붙잡겠다

 

물고기야 힘껏 뛰어올라라

풀바닥 위에다가

나는 너를 메다치겠다

 

폭포 줄기 끌어내려

네 눈알을 매우 치겠다 매우 치겠다 *

 

* 좋은 공부  
너무 서둘러 와 섬진강 매화마을 매화 못 보고 간다.
 
허탕 치는 일도 가끔 좋은 공부가 되지. *

 

* 독락당(獨樂堂)

독락당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

 

* 코스모스

십삼촉보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사는 이 꽃을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뜻이 높은 선비는 제 스승을 홀로 사모한다는 뜻이오나
함부로 절하고 엎드리는
다른 무리와 달리, 이 꽃은
제 뜻을 높이되
익으면 익을수록
머리를 수그리는 꽃이옵니다.
눈감고 사는 이 꽃은
여기저기 모여 피기를 꺼려
저 혼자 한 구석을 찾아
구석을 비로소 구석다운 분위기로 이루게 하는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옵니다. *

 

* 광릉숲

1

광릉숲 갔다 초저녁 제비꽃들이 하늘에 게보린처럼 떠 있었다  

2

광릉숲 갔다 하늘이 배춧잎처럼, 배추줄기처럼 살아 있었다

3

광릉숲 갔다 비 그친 숲속 명주실오라기 같은 비의 자취를 좇고 있는 도마뱀에게 노루귀가 뛰어들었다

흙으로 변해가는 썩은 나무 밑둥치에서 약초 냄새가 창궐하고 있었다 

4

광릉숲 또 갔다

냇가엔 게보린 같은 별들이 내려와 있었고

하늘엔 배추줄기 같은 색깔이 살아 있었다

젖은 덤불 속에서 얼굴 헹군

산나리꽃이 뜨겁게 달겨들었다

 

그대에게 이런 걸 몇 재 지어 보내드리고 싶었다 *

 

* 백지 1 
꽃씨를 떨구듯
적요한 시간의 마당에
백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이 놓고 간 물음
시인은 그것을 10월의 포켓트에 하루 종일 넣고 다니다가
밤의 한 기슭에
등불을 밝히고 읽는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의 뜻
공손하게 달라 하면
조용히 대답을 내려 주신다 *

 

* 겨울산

冬至 지나 잎 다 지자
함박눈이 앞山을 크게 안는다
밤이 들자
다시 한번 크게 안는다
어둠 속에서
모래 한 알을 품고 있다 *

 

* 한하(閑夏) 
이끼 젖은 석등(石燈) 위로 기어오르는 법당다람쥐들 한가롭고
마당의 꽃 그림자 한가로이 창 앞에서 흔들린다
모시 발은 앞과 뒤가 모두 공해서
푸른 산빛 맑은 바람 서로 깨친다 *
 

 

* 겨우내내 움츠렸던

겨우내내 움츠렸던
마로니에 나뭇가지에
움이 돋기 시작하더니
툭툭 불거지기 시작하더니
요얼마 전까지는 물이 서서히 비치기 시작하더니
며칠 사이는 물빛이 뚜렷하게 보이더니
저마다들 몇밤만 지내면 나온다는 소리까지 들리더니
오늘은 일제히 움을 찢고 새파랗게 잎순들이 나왔습니다.  
아 참 반갑습니다.  
뜨시뜨시한 밥 한 사발
아랫목에 감추어 두었다가 내미는 마음
아 참 반갑습니다.  

 

* 금호철화

아, 이 금호철화(金號鐵花)

어려운 식물이지요 쇠꽃을 피웁니다

이 선인장의 성깔을 잘 알지 못하면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콘도르가 사막의 하늘을 맴돌다가 급강하해 앉은 모습

골 깊고 진녹색의 단단한 몸체엔 솟구치고 뻗친 가시들

보세요, 화살촉처럼 무장하고 있어요

가시들은 원산지에서 지나가는 말의 편자까지도 뚫고 올라옵니다

조심하세요 손

이놈들은, 뿌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시가 생명이지요

숨을 가시로 쉽니다 가시가 부러지면 썩기 시작하지요

어찌나 지독한지 뿌리를 몽땅 잘라 삼년을 말려두었다가

모래에 다시 심으면, 서너달이면 제 몸에서 스스로 새 뿌리를 내립니다

흙 나르는 수레바퀴에 구멍을 내는 것도 이놈들입니다

조심하세요, 가시가 살아 있으니까 *

 

* 물소리
"그럼 저녁 6시 마로니에에서 보십시다"
퇴근 후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두 시간 여를 기다리다가
한 시간을 더 기다려보다가
어둠 속으로 나와 전철 타러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밤 어둠 속 마로니에 나무 밑에. 아!
이성선 시인이었다.
"조형이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
는 줄 알았지요."
속초에서 예까지 짊어지고 온 몸이
계곡물소리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물소리가 나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 밤, 몸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갯벌처럼 무겁게 누워 밤새도록 뒤척이다 그냥 간
몸은.

* 매혈자들

그들은 제각기 얼어붙은 몸으로 찾아와 병원 침대에서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선지국 집으로 몰려왔다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이백원짜리 국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개중에는 아편을 사듯 소주 반 병을 시켜 먹고 의자 뒤로 스르르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적십자병원 뒤 영천(靈泉)시장

말바위산이 올려다보이던 어두침침한 밥집에서

서로 등 돌리고

서로의 밥에다 가래침을 뱉는 그 바닥

갈 곳 없는 심연 속을 그들은 걸어 내려갔다

제각기 몸을 등잔으로 삼고 어두움 속으로

육신에 가둬놓은 영혼의 어둠이 견딜 수 없이

몸을 누르고 눈을 봉할 때

그들은 다시 와서 피를 뽑았다 *

* 조정권시집[신성한 숲]-문학과지성사

 

* 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내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
 

* 조정권시집[떠도는 몸들]-창비 

 

 * 고요로의 초대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 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

* 조정권시집[고요로의 초대]-민음사

* 눈매  

우리 일행 중 이탈리아 신부님 한 분이
서양식으로 절하다 말고
안으로 들어가 옷 벗어 놓고 알몸으로 
석굴암 안에서 두 손 모으고 계신
그분의 두 손과 손등을 만져 보고 있었습니다.
연꽃 핀 돌방석을 만져 보고 무릎과 어깨와 등도 하염없이 만져 보고
손을 놓고 계셨습니다.
왜 만졌냐고 물었더니
이 손목을 자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만진 건지
만져 드린 건지 물어보았습니다.
손을 만져 주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왜 만지러 갔는지 다시 물었습니다.
모든 종교심을 초월해 있는 산 인간이기에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고
피부를 만져 보고 싶도록 온후한
체온을
느껴 보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지그시 감은 눈만은 쳐다볼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보다 먼저 그 분이 나를 쳐다보고 있으시기에. *

* 조정권시집[고요로의 초대]-민음사

 

* 청빙가(聽氷歌)  

 
1

  마당을 쓸고 있는 빗자루에게도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준다 어진 시간이여

  2

  놀랐다 대웅전 마룻바닥 천정까지 꽉 들어찬 만산홍엽 단풍빛

  3

  초겨울 햇빛 요즘 톡톡히 옷 노릇 하네

  4

  밤새도록 지붕위로 걸어 다니는 눈송이

  소리 내지 않는 눈부처

  5 

  간밤 내린 눈이

  장작마다 흰 꽃을 수없이 피워놓았다

  도끼날에도 흰 꽃을 달아놓았구나

   6

  겨울 산 한 채 먹으로 개고 또 개어 우둔한 마음으로 마주한다

  맑은 암향(暗香) 힘 뻣세고 뻣세다 붓에 힘 빼고 깊은 먹 속으로 한가로운 늙은 붕어를 찾아본다

  어리석다 내 얕은 붓질

   7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8

  세이각(洗耳閣) 문고리

  소리 하나 없이 공하다

   9

  연못바닥 환하고 공하게 드러나니 두 번 겨울눈이 온다

  10

  내 화두는 추위 한 점 안 먹은 달

  설월(雪月)의 처마 끝

   11

  절 아주머니들 물걸레질 마치고 돌아간

  대청마루에 살얼음 낀 하늘 다시 살아온다

   12

  부엌에 하얗게 씻어다놓은 파뿌리

  스님네들 겨울살이 창호지 구멍만큼 내 비친다

  13

  사는 거 문제없다는 게 문제

  사는 거 큰일났다는 게 큰일

   14

  형광등 빛 같이 흐린 마음에 장닭처럼 홰치는 눈보라

   15

  큰 칼 든 사천왕 옆을 통과할 때마다 마음의 소지품 검사

   16

  꽃길을 지나온 바짓가랑이로 따라오는 흰 나비

   17

  풀밭에 누워 들었다 얼음장 안고 뒤로 흘러가는 봄강물 소리

  18

  배추벌레 애벌레 푸른 배때기 대고 기어가는 잔가지 하나같은 세상

  세 번째 봄이로구나

  19

  버스길로 떨어진 까치알 느티나무 아래서 손 흔들며 버스 세운다

  20

  봄비야 네 집이 예서 가까우냐 오늘밤 곁에서 하루 묵으면 안 되겠니

  21

  석천암 늦가뭄 산더덕 향 대청마루처럼 뻗어나가는 매미울음소리 * 

 *[문학과 사회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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