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가을 시 모음 3

효림♡ 2010. 10. 11. 07:54

* 가을 -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 

* 강은교시집[어느 별에서의 하루]-창비,1996 

 

* 가을 - 김광림 

고쳐

바른

단청빛

하늘이다

 

경내는

쓰는 대로

보리수 잎사귀

한창이다

 

잎 줄기에서

맺혀 나온

염주알

후두둑 떨어진다

 

벼랑 위에

나붓이 앉으신

참 당신

보인다 * 

 
* 가을 -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
 
* 가을 - 문인수
여러 번 붉게 큰물 지고 나서
 
어느 날은 차디차게 발목에 감기는
 
가을
 
하늘에다가는 달게 감홍시 하나 남겨 놓듯이
누군가는 또 한나절 땅에다가는
그러나 그랬달 것도 없이
 
어느 날은 넌지시 징검다리 놓이는 *
 
* 가을 - 박경리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 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리자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
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
 
* 가을 - 박경리
노오란 은행나무
군데군데
 
붉은 지붕 푸른 지붕
군데군데
 
고속도로 가득히
석양은 깔려 있고
들판 볕가리 위에
새들
하루 마지막을 쪼고 있다
 
초라한 내 생애의 가을
차창 밖에는
눈부신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
 
* 가을 - 양주동
가 없는 빈들에 사람을 보내고
말없이 돌아서 한숨 지우는
젊으나 젊은 아낙네와 같이
가을은 애처러이 돌아옵니다
 
애타는 가슴을 풀 곳이 없어
옛뜰의 나무들 더위잡고서
차디찬 달 아래 목놓아 울 때에
나뭇잎은 누런 옷 입고 조상합니다
 
드높은 하늘에 구름은 개어
간 님의 해맑은 눈자위 같으나
수확이 끝난 거칠은 들에는
옛님의 자취 아득도 합니다
 
머나먼 생각에 꿈 못 이루는
밤은 깊어서 밤은 깊어서
창 밑에 귀뚜라미 섧이 웁니다
가을의 아낙네여, 외로운 이여... *
 
* 가을 -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보다도
마른 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며
눈 감은 채 고즈너기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 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소 등불 하나
켜놓고 싶어라
 
서 있는 이들은 앉아야 할 때
앉아서 두 손 안에 얼굴 묻고 싶은 때
 
두 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리거라 *
 
* 가을 편지 - 조찬용
그대가
내 주인이었으면 합니다

그대를 향해
붉게 달려가는
내 맘 아시겠지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시방 온 산과 들이
내 몸처럼 불입니다

그대 안에서
이 가을 활활 타버리는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 가을, 저녁강가 - 윤경희  

단 한 번도

그대에게 가 닿지 못하였다  

 

텅 빈 하늘

내려놓은 어스름 즈음 저녁강가

나직이 산자락 안고 제 몸을 비워가는

스러져간 기억의 편린 울컥 흘러갔다

잔잔한 물소리 야윈 등을 떠받고

검붉은 강바닥으로 조금씩 가라앉았다

별이 와서 지고, 꽃이 와서 또, 그렇게 지고

풀벌레들 까맣게 밤을 지세고 간

그 강가, 온종일 비가 내려 몸이 퉁퉁 불었던

때 늦은 雨氣가 남기고 간 맨 몸의 미루나무

내 갈증의 출렁임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는 지친 물소리 아픈 허리를 눕혀본다

 

* 가을밤 - 이해완 
귀뚜라미여 

잠시   
울음을
그쳐다오

시방
하느님께서
바늘귀를
꿰시는 중이다

보름달
커다란 복판을
질러가는




 

* 가을 - 이정하  

가을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물들이며 옵니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모두가 닮아 갑니다

 

내 삶을 물들이던 당신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벌써부터

나, 당신에게 이렇게 물들어 있는데

당신과 이렇게 닮아 있는데 *

* 이정하시집[사랑해서 외로웠다]-자음과모음

 

* 가을 강(江) - 김명인
살아서 마주보는 일조차 부끄러워도 이 시절 
저 불 같은 여름을 걷어 서늘한 사랑으로 
가을 강물되어 소리 죽여 흐르기로 하자
지나온 곳 아직도 천둥치는 벌판 속 서서 우는 꽃 
달빛 난장(亂杖) 산굽이 돌아 저기 저 벼랑 
폭포 지며 부서지는 우레 소리 들린다 
없는 사람 죽어서 불 밝힌 형형한 하늘 아래로 
흘러가면 그 별빛에도 오래 젖게 되나니 
살아서 마주잡는 손 떨려도 이 가을 
끊을 수 없는 강물 하나로 흐르기로 하자 
더욱 모진 날 온다 해도 *

 

* 가을에 - 김명인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때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 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

*모감주-무환자과의 낙엽 교목. 절이나 묘지 부근. 집 근처에서 볼 수 있다.

열매는 염주(念珠)를 만드는 데 쓰임

 

*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 나태주시집[시인들 나라]-서정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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