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월에 - 양성우
이 산골짜기에 가을이 오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어느 한나절에 문득 찬바람이 불어오니
여기저기 계곡 물 흐르는 소리들도 잦아든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속절없이 왔다가 가는 것은
사람의 시간이다
살 속에 가시처럼 파고드는 여러 회한이여
길은 묻히고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숨을까
마치 쏟아지듯이 다시 오는 날까지 허공에 머물려고
떠나는 것들의 영혼들과 함께 가고 싶다
두런거리는 소리도 없이 아침저녁 다르게 시드는
풀잎, 떨어져 누운 마른 나뭇잎들에게는 미안하다 *
* 양성우시집[아침꽃잎]-책만드는집
* 벌판으로 - 양성우
저 벌판에 내가 가리라.온갖 근심들 다 지고 내가 가리라
무릎 찬 물여울을 건너 돌자갈을 밟고 붉은 흙 젖은 길 따라 내가 가리라
어느 거친 바람결에 뽑혀 누운 죽은 나무 흰 등걸들을 지나 수풀을 헤치며 내가 가리라
내 안의 모든 상처 아직도 아물지 않았느냐. 넋 두고 몸 하나로 내가 가리라
가다 보면 그 어디에 머물 곳 없으랴. 거친 바람 저 벌판에 내가 가리라
땅 끝 너머 아득히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
* 물오른 길 - 김사이
한가위 달빛이 무색하게 들썩이며 번쩍거리는 목포를 돌아 고향으로 가는 길 물오른 처녀 방뎅이처럼 탱탱한 둥근 달, 몸뚱이가
환장한다
쫄망쫄망한 아이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처럼 빙 둘러 티 하나 없이 까만 산봉우리들 경계 위로 보름달은 더욱 빛을 발하고 덩달아 내 몸 色色이 투명해진다 들뜬 택시기사 얼굴을 어루만지는 터질 것 같은 저 달, 아, 무섭도록 사랑의 기운이 충만해지며 숨소리마저 잦아들고, 토란잎 위에 또로록 굴러다니는 작은 물방울들처럼 총총한 별들은 내리쏟아지며 은빛 꿈을 잉태시키는데 저 까만 산그림자 아래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풍성한 달빛 온몸으로 받아 그 빛으로 사랑을 나누어보았으면, 흔적도 없이 달의 정령이 되었으면.....
* 김사이시집[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
* 그 풀 - 문효치
그 풀의
그늘에 들어 쉬네
네가 날려 보낸
편지 속의 작은 새
아직 따뜻한 체온으로
그 그늘 덥히고 있네
가지런한 손등에서
언제나 발돋움으로 서 있던 광택
그 그늘 밝히고 있네
때론 먼 바다 보길도쯤에서 담아온
푸른 파도 한 보자기 풀어 놓고 있네
내 핏줄에 흐르고 있는
서늘함
그 풀의 그늘에 들어 쉬네 *
* 문효치시집[계백의 칼]-연인M&B
* 참외 꼭지 - 장철문
여러 날 따지 못했다
때를 놓쳤다
우리 부부는 싸웠고
참외는 개미가 먹었다
포식을 했다
줄줄 흘러내린 과즙은
까마중이 먹었다
물관과 체관을 지나고
흰 꽃을 지났다
아까 날아오른 두엇은
씨앗 도둑이다
내장으로 가서
곧 항문을 지날 것이다
내 참외를 천지가 먹었다
도둑놈! *
* 장철문시집[무릎 위의 자작나무]-창비
* 짧은 말 - 박순원
요새는 밥솥도 말을 한다 증기 배출을 시작합니다
백미 고압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쿠쿠
모기도 할 말이 있어 내 주위를 맴돌고
강아지는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가 만다
버스를 기다리다 나무를 쳐다보면 나무는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는 듯이 딴 데를 본다
튀어나온 보도블록을 밟으면 찍하고
물을 뱉을 때가 있다
나는 주로 핸드폰에 대고 말을 한다
이제는 멀리 살고 전화번호도 바뀐 옛 애인도 지금
누구하고 밥풀 같은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
* 박순원시집[주먹이 운다]-서정시학
* 매생이국 - 안도현
저 남도의 해안에서 왔다는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라고 해야 하나?
숙취의 입술에 닿는 이 끈적이는 서러움의 정체를 바다의 키스라고 해야 하나? 뜨거운 울음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서 오장육부까지 이어지는 푸른 물줄기의 폭포여
아무리 생각해도 아, 나는 사랑의 수심을 몰랐어라 *
* 안도현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 처음처럼 - 안도현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
* 해바라기 - 문성해
이 땅에는
경작할 전답 한 마지기 없어
허공 한 귀퉁이를
일궈놓은 이가 있으니
태양과 비가 가까워
저리도 탱탱하게 알곡이 여물었나니
허공의 족속들아
어서 와서 진밥을 지어 먹고
더 넓은 허공으로 볍씨를 뿌릴지어다 *
* 문성해시집[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 대숲소리 - 서하
구름이 달을 옆구리 끼고 있는
송광사의 밤은 푸르기만 한데
화엄전 월조헌 뒤뜰 대숲이 애터지게 운다
대숲은 마디마다 바다를 들여놓았나
쓰러질 듯 일어서며
쏴아 쏴아 쏴아
뱉어내는 파도소리에
내 몸이 자꾸 뒤로 쏠린다
탁 풀어놓지 못하고 참았던 울음보따리들
오늘은 모조리 불러내어
며칠 굶은 짐승처럼 퍼지른다
짓물러 짭쪼름한 저 울음은
창망대해 일었다 사라지는 씀벅씀벅한 허기
등 구부린 채 밤새 목탁 치는
스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소리 위의 소리, 비릿하다 *
* 냉이꽃 - 김영천
무슨 자잘한 생각들이 모여서
저리 우루루 피어났을까
땀으로 배여 소금기 서걱거리는 속적삼 같이
하얗게 피었구나
함부로 박힌 돌멩이도 피하지 않고
우리네 사투리가 닿는 곳이면
어디나 피어나서는
너를 볼 때마다
유년의 기억들이 황급하게 달려와
내 코끝을 매웁게 하는구나
하찮은 바람에도 옹알옹알거리며
이리저리 함부로 흔들리는
세상일에는 참 서투른 꽃
유년의 그 가시나처럼
가만히 이름을 부르다 만다 *
* 연잎에 고이는 빗방울처럼 - 이홍섭
연잎에 고이는 빗방울처럼
나 그대에게 스밀 수 없네
경포호수를 다 돌아도
닿을 수 없는 그대 사랑, 빗방울 소리
빗방울 굵어지고
연잎은 하염없이 깊어가네
나 방해정(放海亭) 마루에 홀로 서서
불어나는 호수를 바라만 보고 섰네
스밀 수 없는 그대 사랑
내 가슴을 열어
출렁이는 호수를 다 쏟아내어도
닿을 수 없는 그대 사랑, 빗방울 소리
나 이제 야위어 호수에 잠기네
나 이제 야위어 연잎에 잠기네 *
* 그대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휴먼앤북스
* 파꽃 - 조은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난다
너의 방을 두드리는
내 몹시도 발목이 비틀거렸다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나는 존재여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나는 존재여
머리 숙이고 있어도 몇 발짝 앞
문 잠그는 너의 손가락이 보였다
간혹 보였다
눈이 다 감기도록 우울하고 신선한 존재여
긴 밤을 위해
핏줄 사이로 끈끈한
바람이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캄캄하게 채워진 내 몸의 단추 하나가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파꽃이여 *
* 그대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휴먼앤북스
* 11월 - 김은숙
내 안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다 비워낸
물기 없는 내가 스산해서
지는 해의 붉디붉은 신열 저만큼에 두고
한참을 서 있는 11월
오래 앓던 정신의 밀도도 내려놓고
생의 속도마저 지워가며 낮아지는
겸허히 서늘한 계절
순한 손이 깊숙이 고요를 들이고
깊숙한 고요로 잠기고 *
*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
* 소 - 이종문
소가
우두커니
마구간에 엎드려서
내리는 함박눈을 멍하니.....보고 있다
아침에 내리는 눈을
아침도
아니
먹고 *
* 고요 - 이종문
붉은
고추를 먹은
잠자리 한 마리가
억 년 고인돌에 슬그머니 앉는 찰나
바위가 우지끈, 하고
부서질 듯
환한
고요
* 마음 그릇 - 이정하
당신을 향한 사랑을 담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작은가 봅니다
이렇듯 미어 터질 듯하니 *
* 묵은 등걸에 핀 매화꽃 아래 - 이준관
묵은 등걸에 핀 매화꽃 아래
외진 집 한채 짓겠네
책 한 권 펼치면 꽉 차는
토담집 한 채 짓겠네
밤이면 매화꽃으로 불을 밝히고
산(山) 달은 산창(山窓)에 와서
내 어깨 너머로 고시(古詩)를 읊으리 *
* 초승달 기차 - 손택수
기차가 휘어진다//
직선으로, 무작정 내달려 온 땅을//
가만히 안아보는 기차//
상처투성이 산허리를//
초승달이 품는다//
달 속에서 기적이 울린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