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음식 시 모음 2

효림♡ 2010. 10. 15. 08:15

* 가을전어 - 김창근  

한 접시 바다의 뼈를 발라 

식탁 위에 눕혀 놓고는 

소주 한 잔에 떠올리는 

비린 추억의 가을 

세월처럼 덩달아 가버린 날이 

가지런히 누워 물결 포개면 

밀려오는 갯가 일렁이는 

파도소리 가을은 그렇게 남아 

쓸쓸한 그늘 삽상한 손맛 

함께 입맛 다시며 살아 있는 

날들의 짙푸른 반추 

천리의 근심도 만리의 우울도 

한 접시 바다를 길어 

한 잔 술로 풀어 마시며 

풍편에도 소식이 없는 너의 

안부를 버무려 식초를 친다 *

 

* 꽃게탕을 먹는 저녁 - 김영언

고작 서너 척의 낡은 고깃배들이 몇 배나 많은 횟집 불빛들을 휘황하게 잡아들이는 강화 선수 포구 강 같은 어둠을 타고 떠내려오는 바다 건너 席毛島의 불빛 찰찰 부어 한잔 또 한잔 마시며 어둠이 진하게 졸아들수록 얼큰해지는 꽃게탕 떠먹을 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 가라앉으면서도 둥글넓적한 등판 옆구리에 뾰족하게 담금질하던 창끝과 끝까지 오므리지 못하고 벌겋게 경련하던 큰 집게발이 화끈화끈 가슴을 후벼대던 그 저녁 내내 우리도 마음 속 깊이 가라앉혔던 오기 한 자락씩을 갈아 세웠지 아무도 우리를 더는 가라앉힐 수 없도록 *

 

* 홍합국 - 한승수 

출근길 밥상에

달랑 홍합국 한 그릇

양념하나 넣지 않고

급하게 물만 부어 끓였다는데

간도 적당하고

담백하니 참 시원하다

 

마주 앉은 아내

화장기 하나 없이

반짝이는 물빛 얼굴로

미안한 듯 나를 바라보는데

절로 우러나는 웃음살이

그대로 홍합국 국물 맛이다 *

 

* 홍합 -몸 이야기 30 - 권천학 

취한 속 씻어내려고

홍합을 삶는다
덜그럭거리는 껍질 골라 까먹는 동안
시원한 국물 맛에 쓰린 속 조금씩 풀리고
구겨졌던 시간들도 허리를 펴는데

끝내 입을 열지 않는 홍합이 있어

 

칼을 들이댄다

 

끓여도 끓여도 열리지 않는 문

죽어서도 몸을 열지 못하는

그 안에 무슨 비밀 잠겼을까?

남의 속은 풀어주면서

제 속 풀지 못하는 홍합의 눈물

그토록 깊어 단단했구나

들이댄 칼로 내 속을 찔리고 마는

죽어서도 못 열 비밀 하나쯤

간직하고 사는 붉은 니 마음

내 알리

알리 *

 

* 가을 전어 - 정일근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 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 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약이 되고 맛이 되는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가을에는 시인의 몸속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슬픔 있으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또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굵은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호기롭게 피워 올리자 *

 

* 가을 전어를 살리다 - 정일근  
용주사에서 하안거 마치고 오신 현전 스님 앞에
두툼한 가을 시편들 자랑처럼 펼쳐놓았는데
시 수십 편 읽으시다 한 줄에 놀라 물러서신다
칼로 썰어달라니! 시에 피냄새 진동하는구나!
스님 주장자 들어 내리치신다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마음에 피 흘리지 않고
그분의 길 조용조용 따라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 시에서 풍기는 피냄새 내가 맡지 못했구나
어쩔거나, 시가 저 착한 것들 모두 썰어버렸구나
어쩔거나, 무심한 시가 칼이 되어 생명 저미었구나 

가을전어들 시로 죽였으니 시로 살리기 위해

가을이 오는 바다에 시를 용서처럼 풀어놓는다

가을 전어들이여, 너희들 살아서 바다로 돌아가시라
몸속 서 말 깨는 탈탈 털어 세상에 던져버리고
현전 스님 들려주시는 화엄경 뼛속 살 속에 담고
그분의 바다로 돌아가 극락왕생 하시라 *

 

* 팥죽을 끓이며 - 임혜주

그새 또 잊었다
오랫동안 또글또글해졌을 팥
웬만해서는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옹골지게 굳은 팥에게도 껴안았던
햇빛 다 풀어 놓을 시간이 필요한 법
한 시간에 해치울 욕심 놓아두고
약한 불로 되돌린다 그제서야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는 선
믹서에 마저 갈아 체에 거른다
헤쳐진 살 고루고루 퍼지게
잘 저어야 하는데 반죽 다듬는 사이
파르르 넘친다 아, 이 불같은 성질
저어주지 않으면 밑이 타지고
위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야 마는
천천히 있어야만
지 성질 온전히 풀어지는
압축된 열
 
그래서 팥죽은 붉다 *
 
*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 사발을 들어올릴 때 - 고정희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

 
* 감자탕을 먹으며 - 강제윤
그대에게 줄 것이 없어
감자탕을 먹으며
뼈를 발라 살점 하나 건넨다
그대는 손을 젓는다
  
내 살이라도 뜯어주고 싶은데
고작 돼지 등뼈에 붙은  
살점이나 떼어주는 나를
그대는 막는다
  
나는 그대의 슬픔을 모른다
그대 안에 깃들지 못하고
저녁 구름처럼 떠나간 그대의 사랑을 모른다
  
늦은 저녁
그대와 마주앉아 감자탕을 먹는다
그대 옛사랑의 그림자와
감자탕을 먹는다
  
그대는 그대의 슬픔을 모른다
그대는 그대의 쓸쓸함을 모른다

그대 옛사랑의 늦은 저녁
그대와 감자탕을 먹으며
내 뼈에 붙은 살점 하나
그대 수저 위에 올린다
 
* 함평세발낙지 - 이창수 
낙지를 먹을 땐 머리부터 천천히 꼭꼭 씹어야 한다
무심코 다리부터 입안에 넣을 짝 시면
뻘밭에서부터 솟구쳐나오는 힘
바다로 미끄러지는 꿈
땡볕으로 자라나는 뼈마디의 저항이
정수리에 달라붙어
한꺼번에 당신을 뻘밭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토막을 내어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그 고집
진흙 속에서 끌려나올 때는
사나운 파도와 닮은 성깔이지만
젖은 몸 달빛에 말릴 때에야
비로소 부드러운 마음 드러내는
함평 돌머리 바다의 세발낙지
몸 안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 껍질 다 버리고서도
너른 바라 빛나는 물결 끝내 잊지 못하는 녀석
시장바닥, 바닷물 뽀글거리는
고무물통에 담겨 함부로 흐물거리지만
그대 튼튼한 이빨로는 결코 끊을 수 없는
문드러진 눈물과 날 세우는 파도의 꿈
개펄의 응집력으로 키우고 있다
 

* 묵은 지 - 김영천  
싱싱하고 맵고 짜고
조금은 달콤한 생김치를 두고는
시어빠진 김치를
쭉쭉 찢어먹는 나를 웃으십시오

나는 아직도 저렇듯
겉저리에서 속잎 하나까지
고루 발효하여
부드럽게 시어지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감싸며
어깨 기대며
한 세월을 푹 삭으면
나도 세상 맛이 나겠습니까

오래 오래 당신들을
잘 견디면
이제야 사람 맛이 나겠습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생김치를 먹듯
늘 생경하고 싱그러운
당신 앞에서
지금은 내가 외려 낭패하느니

아직도 숨을 죽이지 않은 새파란 이성이
더러 내 바깥을
넘겨다 봅니다

 

*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 복효근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심장은 뛸 수 있을까 사십에
그까짓 눈에 속아
입천장을 데어가며 시든 콩나물 악보를 밀어넣는다 * 

 

* 김치찌개 평화론 - 곽재구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

* 곽재구시집[전장포 아리랑]-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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