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형진 시 모음

효림♡ 2010. 10. 20. 08:37

* 입춘단상 - 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 사랑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 

 

* 수선화

피는 것을 시새우는

바람에 흔들려도

수선화

바르르르르

피어나던데

 

사는 것이 고달퍼도

먼 산 한번 바라보고

가만히

고개 숙여

견뎌 냅니다 *

 

* 매화
봄도 채 오지 않아서
매화 꽃망울이 터지는 건
그리운 마음을 저도 다
삭히지 못하는 때문

찬바람 맞으며 서서
홀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건
하고 싶은 말들을 저도 다
못하기 때문 *

 

* 다시 들판에 서서 1

햇살이 
가을 햇살이 좋아 
밭 가운데 서 보면 
지난여름 무엇을 했느냐 
내게는 묻지 않고 
혹독한 시련 견디어 낸 
수수 모감지 숙여 겸손케 하는

바람이 좋아 
휘어이ㅡ 휘어이ㅡ 
지친 내 마음도 함께 
고개 들고 손 사래쳐 쫓으면 
이마의 땀 씻어 주고 
등 다독여 주는 바람이 좋아 
흐르는 바람이 
너무도 좋아

 

* 다시 들판에 서서 2

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
눈물 뿌리지 않는다면
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
사랑일 수 있으랴

수수깡 빈 대궁인 채 바람에 날리며
잿빛 산등성이 등지고 기인 그림자 끄는
네 몸뚱이, 죽어
또 죽어 땅에 몸 눕히면
구름만 덮일 뿐 모두 다 떠나가는데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
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
어찌
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 *

 

* 돼지고기 한 근  

내일 모레 몸풀 날이 돌아오는 아내는

어려운 부탁을 하듯

돼지고기 한 근만,

상추 쪼금하고 사다 달라고

어려운 부탁을 하듯

부탁을 했다

남들은 잘 먹지도 않는

돼지고기만을

처녀 적부터 억시게 잘 먹는,

그래서 돼지고기 한 근만으로도

두 아이를 낳도록

행복해했던 아내가

전화에 대고

늦게 와도 좋으니 돼지고기 한 근만

사다 달라고,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용호야,

돈 만 원만 빌려다오

호주머니에 단돈 천 원 남았다고

아내에게 말은 했지만

나는 맨손으로 집에 갈 수가 없구나

돼지고기 한 근을 사면서

나는 또 우울해진다

그 사람은 이것으로 국을 끓이고

내일 아침 남겼다가 다시

반찬을 만들어 상에 올리겠지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서 나는

돈을 꾸어서 뭘 사간 적이 있었던가

천 원짜리 한 장 없이

며칠을 돌아다닌 놈이

아픈 자책을 누르고 잔돈을 쑤셔 넣고

저 푸른 하늘을 본다

흰구름만 떠가는 *

 

* 새참  

- 여봐, 이댁네! 올해도 자네랑 고추밭 비닐 씌운 게 생각나네. 작년 대관네 밭에서 고추 비닐 씌울 때 날은 오사게 뜨겁지 배는 고프지 막걸리는 생각나는디 막걸리는 동네에 없지, 할 수 없이 소주 댓병을 사다가 막걸리마냥 꿀떡꿀떡 마실라고 물을 타서 먹었지 않은가 씨고 싱건지도 모르고 어찌나 맛있게 먹었던지 여자 넷이서 그것도 모지라 이홉짜리 한 병을 또 사다 먹었지 안힜어 어디, 지금도 그렇게 맛있을랑가 자! 이놈 물 탔잉게 한번 먹어보소.....

ㅡ옘병 지랄, 아무 맛도 없다 이 잡것아!

 

* 비로소

우리

닫힌 마음의 정수리를 

도끼로 내리치듯 쪼개고 들어가야

 

돌 속에 박힌

보석 같은 사랑 하나

얻을 수 있다

 

* 빈집 2 
울안엔
앵두가 익어 갔어요

망초꽃은 마당 가득
우거져 날리고

망초꽃은
날리고

앵두만 익어 갔어요

 

* 남백산 씨 

변산면 마포리 종암 사시는

금년 나이 여든다섯의 남백산 씨는

비루먹은 소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흐연 증우 적삼을 걷어 부치고

이랴 쪄쪄-

 

금년에도 뙈기논을 갈고 있습니다

소가 빨리 가지 않아도 그만

가다가 흘낏 뒤를 돌아봐도 그만

이랴 쪄쪄 한마디 뿐

보거리질도 한번 않습니다

 

변산 들러 격포 채석강 찾아오는 관광객들

토요일 일요일이면 자가용 몰고

줄줄이 종암 고개 넘어오는데

팔구십 백 키로를 신나게 밟고 오는데

오늘은 남백산 씨 달구지에 걸렸습니다

 

뒤에서 죽어라 빵빵대도

쟁기 떼어서 달구지에 싣고 

고삐 채 잡고 앉아 우선

담배부터 한 대 말아 부칩니다

 

이랴 쪄쪄ㅡ 바쁘면 늬가 바쁘지 내가 바쁜가?

종암 고개 천천히 올라갑니다

구십 고개 그렇게 올라갑니다

 

성질 급한 차들

한 십 리 뻗쳐 있습니다

 

* 땅의 사람들

입동 전에만 묻어 달라던

보리 같은 사람들이 보리를 심고

제 몸 하나는 끌어 덮을 새 없이 겨울을 나는.....  

그 쌀의 속살 같은 마음들이 다시

봄이 되면 나락을 뿌린다 *

 

* 점심

혼자 일하면

거침이 없어 좋다

밥 한 사발
된장 한 중발
보자기에 싸서 그늘에 놨다가
고추 몇 개 따 땀과 함께 씻고
수저가 없는들 어떠랴
개미가 먼저
입으로 물어간다

불타겠네

여러날 장마에 자라던 곡식 떠내려가서

오뉴월 염천, 밭을 다시 갈아 엎네

녹두밭 고랑 위에 떨어지는 땀방울

들깨밭 이랑 위에 쏟아지는 한숨

가을이 오면 녹두밭에 퍼렇게 맺힐까

가을이 되면 들깨밭에 노랗게 불탈까

먼산 바라기

담배 한 대 먹고

일 조금 하고

또 한대 먹고

또 조금 하고

담배 한 대

일 쪼금

또 폭폭

또 잠깐

풀은 산처럼 자라는데

산처럼 자라는데..... *

 
* 추석이 낼 모레  

흥보의 마음이 이랬을까

추석이 낼 모레

박 다섯덩이는 따서 내 지게에 지고

서너 발 됨직하게 캐 담은 고구마는

어머니 흰 머리에 이고 집에 왔는데

박을 타던 내 옆에서 지켜보던 큰 놈이

우리는 왜 장에 안 가냐 하고

둘째 놈도 덩달아 졸라댄다

검소하고 조용하게 보내는 것이 명절이란다

남들과 똑같은 게 좋을 것 없지

일손을 놓고 달래보는데

오늘따라 하늘이 더욱 푸르고

추석이 낼 모레

아내가 쓸어 놓은 정한 마당에

감나무 이파리만 떨어진다

이 박을 타거들랑 우리 꽃님이 운동화 한 켤레와

간조기 몇 마리

또 이 박을 타거들랑 어머니 양말 한 켤레와

우리 아루 때때옷 한 벌만 나와 줄랑가

나는 어느덧 노래를 불렀는데

아니다, 아니다

매운 연기 속에서 고구마를 찌시는 정정한 내 어머니와

조르다 조르다 저들끼리 놀고 있는 내 딸들

이런 순간만이라도 오래 오래 있게 하여 달라고

다시 노래를 불렀는데...... *

* 박형진시집[다시 들판에 서서]-당그래

 

* 박형진시인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1992년 [창비]등단
-시집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다시 들판에 서서][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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