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 문인수
11월, 이 빈 당간지주에 뭘 걸치고 싶다.
단풍 붉게 꿈틀거리며 바람 넘어가는 저 산능선
다리 벌리고 서서 오래 바라본다.
저걸 걷어 길게 걸쳐 입고 싶다.
파장에 홀로 남아 거나하게 한잔
아, 탈진한 生의 거대한 춤,
저녁노을에다 섞어 훨훨 몸 넘고 싶다
* 11월 - 김은숙
내 안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다 비워낸
물기 없는 내가 스산해서
지는 해의 붉디붉은 신열 저만큼에 두고
한참을 서 있는 11월
오래 앓던 정신의 밀도도 내려놓고
생의 속도마저 지워가며 낮아지는
겸허히 서늘한 계절
순한 손이 깊숙이 고요를 들이고
깊숙한 고요로 잠기고 *
* 11월 - 서정춘
단풍! 좋지만
내 몸의 잎사귀
귀때기 얇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
어디서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프로판가스가 자꾸만 새고 있을 11월
* 11월 - 고은
낙엽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11월 - 최정례
느닷없이 큰 곰이
천장까지 닿는 검은 그것이 나타나
우리 집 고양이를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나를 그러면?
함께 살자고 하면?
이 집 커튼을 찢고 들어와
돌이 된 내 심장을 두들기며
그러면 어떡하지?
창문의 불빛을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현관문에 피아노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집달리처럼
11월 어느 날
무심한 곰의 얼굴로 들이닥쳐서
TV에서 배 두들기며 웃는 코미디언들
얼굴 위에 재를 뿌리고
소파 위에 내 손바닥 위에
뜨거운 석탄을 올려놓으면
그러면?
이 집 사느라 진 빚
이자의 이자 때문에
넌 역전 앞에 가 신문지나 덮고 누워 있어라
그러는데도
기대고 싶고 조금은 은근히 살고 싶어지면
그러면? *
* 안도현[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이가서
* 11월 - 이성복
1.
등뒤로 손을 뻗치면 죽은 꽃들이 만져지네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들
손을 빼치면 온통 찐득이는 콜타르투성이네
눈을 가리면 손가락 사이로 행진해가는 黃帽派
승려들, 그들의 옷은 11월의 진흙과 안개
김밥 마는 대발처럼 촘촘한 날들 사이로 밥알
같은 흰 꽃 하나 묻어 있었네 오랜 옛날 얘기였네
2.
그대 살 속에 십 촉짜리 전구 수천 빛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펼쳐놓은
통치마 같은 길 위로 날들은 지나가네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내로 들어가는 분홍빛
얼굴의 돼지들처럼, 침과 거품 흐르는 주둥이로
나 완강한 쇠창살 마구 박아보았네 그 쇠창살
침과 거품 흘러내려 흰 고드름 궁전 같았네
3.
11월, 천형의 땅 삶긴 번데기처럼 식은
국물 위에서 11월,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노크 한번 하지 않았으므로 11월, 미구에
감긴 눈으로 쏟아져들어올 흰 눈 흰 밀가루
포대 터져 은박지로 구겨질 겨울 11월,
이젠 힘이 부쳐 일어서지 않는 성기
포르노처럼 선명한 욕망의 밑그림 11월,
삼켜지지 않는 뜨거운 수제비알 같은 여름
4.
겨울의 입구에서 장미는
붉은 비로드의 눈을 뜨고
흰 속눈썹처럼 흔들리는 갈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우는
가을꽃들의 울음을 나는
듣지 못한다 초록 네온사인
'레스토랑 청산'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
* 11월 - 황인숙
달이
빈 둥지처럼 떠 있다.
한 조각씩 깨어져
흘러가는
강얼음 같은 구름 사이에.
그곳에서
내 손은 차가웠다.
내 가슴도, 배도, 다리도, 발도 차가웠다.
내 입술은 차가웠다.
콧등도 각막도 눈썹도 이마도 차가웠다.
머리카락도 차가웠다.
뱀인 나의 피는 얼어가고 있었다.
달빛이 한기로 가득찬 그곳에서.
나는 밤 속에서도 응달에서
영원히 그 곁을 벗어날 것 같지 않은
낡은 달을 본다.
이제는 더 이상 추억을 지어내지 못할
죽은 새의 둥지를. *
* 11월 - 장석남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덥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안 것도 겨우 엊그제 저물녘, 엄지만한 새가 담장에 앉았다 몸을 피해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총총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였습니다
세상을 저승처럼 둘러보던 새 이마와 가슴을 꽃같이 환히 밝히고서 몇줄의 시를 적고 외워보다가 부끄러워 다시 어둠속으로 숨는 어느 저녁이 올 것입니다
숲이 비었으니 이제 머지않아 빈 자리로 첫눈이 내릴 것입니다 눈이 대지를 다 덮은, 코끝이 시린 아침 나는 세상에 다시 나듯 문을 열고 나서고 싶습니다 가시넝쿨 위로 햇빛은 무덤처럼 내리쌓일 것입니다 신(神)은 그 맨몸을 흐르던 시냇가 살얼음으로도 보이시고 바위틈의 침침한 어둠으로도 보이시며 첫눈의 해석을 독려할 것입니다
살던 집의 그림자도 점점점 길어집니다 첫딸을 낳은 아침처럼 잃었던 경탄을 되찾고 숲으로 이어진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득한 숲길이 되려 합니다 햇빛 아래의 가여운 첫눈이 되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휘파람이 되려고 합니다 밥과 국을 뜨던 소리들도 식어서 함께 바람소리를 낼것입니다 *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病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 황지우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 11월의 시 -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을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
* 11월에 - 이해인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 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 11월 - 김남극
거친 사포 같은 가을이 와서
슥슥 내 감각을 갈아놓고 갔다
사포의 표면이 억센 만큼
갈린 면에 보풀이 일었다
그 보풀이 가랭이를 서늘하게 만드는 바람에
스닥일 때마다
몸속에서 쇳소리가 났다
내가 서걱거리면
몸속에 든 쇠종이 윙윙거렸다
몸이 통째로 울림통이 되고
사지를 벗어난 소리가 먼 산 나무를 흔드는
11월
갈린 감각에 날이 서길 기다리며
마을 어귀에 오래 서 있었다 *
* 십일월 - 조경자(수녀시인)
미쳐 신발을 신지 못한 여린 풀잎들
서로를 껴안고
서늘한 갈바람을 견디고 있다
듣는다
하오의 자작나무 숲에서
먼길 나서는 낙엽들의 행렬
행렬 위로 겹치는 그리운 얼굴들이여
사랑하라
더 많이 사랑하라
아직 볕이 있을 때
용서의 팔을 벌려
남아 있는 대지의
살아있는 숨소리를 갈무리하라
아쉬움에 고개 넘지 못한
여윈 햇살
자작나무 숲에서 마른 기침을 한다 *
* 십일월 - 고재종
강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고개를 쳐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
밀감빛 깔린 서쪽 하늘로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 봉우리를
느린 사 박자로 넘는다
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
소소소 이는 소슬바람이 갈대 숲에서 기어 나와 마을의 등불
하나 하나를 닦아 내는 것도 그때다
* 십일월 - 박영근
나 또한 십일월의 저 바람 속으로 몸을 부리고 싶다
바람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떨구는 옛 기억들을 받아
저렇게 또 다른 길을 만들고
홀로 깊어질 만큼 깊어져
다른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우리들 그 헛된 아우성을
쓸어주는구나
혼자 걷는 길이 우리의 육신을 마르게 하는 동안
떨어질 한 잎살의 슬픔도 없이
바람 속으로 몸통과 가지를 치켜든 나무들
마음 속에 일렁이는 잔등(殘燈)이여
누구를 불러야 하리
부디
깊어져라
삶이 더 헐벗은 날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
* 박영근시선집[솔아푸른솔아]-강
* 다시 11월 - 박영근
꽃 떨어진 그 텅 빈 대궁에 빗물이 스쳐간다
이제 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거센 바람뿐
詩 한줄 없이 바람 속에 시들어
눈 속에 그대로 매서운 꽃눈 틔우리 *
* 십일월의 나무 - 도종환
십일월도 하순 해 지고 날 점점 어두워질 때
비탈에 선 나무들은 스산하다
그러나 잃을 것 다 잃고
버릴 것 다 버린 나무들이
맨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 무렵이다
거기다 철 이른 눈이라도 내려
허리 휘어진 나무들의 모습은 숙연하다
이제 거둘 건 겨자씨만큼도 없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곳 없는 건 이때다
알몸으로 맞서는 처절한 날들의 시작이
서늘하고 탁 트인 그림이 되는 건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십일월의 나무들 - 장석주
저녁 이내속에
나무들 서 있다
몸통에 감춘
수천의 눈들
산능선 겹겹 파도 가없이
밀려가는 걸
바라보고 서 있다 *
* 남산, 11월 - 황인숙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
*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 - 문태준
눕고 선 잎잎이 차가운 기운뿐
저녁 지나 나는 밤의 잎에 앉아 있었고
나의 11월은 그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에 불과하고
오로지 풀벌레 소리여
여러번 말해다오
실 잣는 이의 마음을
지금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
지금은 아직 이 세계가 큰 풀잎 한장의 탄력에 앉아 있는 때
내 낱잎의 몸에서 실을 뽑아
풀벌레여, 나를 다시 짜다오
너에게는 단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을 시간만 남아 있느니
* 슬픈 공복 - 정진규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 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 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 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
* 정진규시집[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2009
* 11월의 숲 - 심재휘
가을이 깊어지자 해는 남쪽 길로 돌아가고
북쪽 창문으로는 참나무 숲이 집과 가까워졌다
검은 새들이 집 근처에서 우는 풍경보다
약속으로 가득한 먼 후일이 오히려 불길하였다
날씨는 추워지지만 아직도 지겨운 꿈들을 매달고 있는
담장 밖의 오래된 감나무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 나는
숲이 보여주는 촘촘한 간격으로 걸어갈 뿐이다
여러 참나무들의 군락을 가로질러 갈 때
옛사람 생각이 났다 나무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자꾸 몸을 뒤지고는 하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길쭉하거나 둥근 낙엽들의 기억에 관한 것 밖에는 없다
나는 내가 아는 풀꽃들을 떠올린다
천천히 외워보는 지난 여름의 그 이름들은 그러나
피어서 아름다운 순간들에만 해당한다
가끔 두고 온 집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한때의 정처들 어느덧 숲이 되어가는 폐가들
일찍 찾아온 저녁의 기운에 낙엽 하나가
잔 햇살을 보여주기도 감추기도 하며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 규칙을 궁금해하지만 지금은
낙하의 유연함을 관람하기로 하는 때 그리하여
나는 끝없이 갈라진 나뭇가지의 몸들을 만지며
내가 걸어가는 11월의 숲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할 뿐이다 *
* 심재휘시집[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문학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