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 최승호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莊子를 읽으리라 *
* 최승호 시집[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지성사
* 인식의 힘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니체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
* 최승호시집[얼음의 자서전]-세계사
* 꿩 발자국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꿩이 눈밭을 걸어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뚜렷한 족적(足跡)을 위해
어깨에 힘을 주면서
발자국 찍기에 몰두한 것도 아니리라
꿩조차 제 흔적을 넘어서 날아간다
저자의 죽음이란 흔적들로부터의 날아오름이다 *
* 밥숟갈을 닮았다
움푹해라 내 욕망은
밥숟갈을 닮았다
천 만개의 숟갈이 한 냄비에 덤비듯
꿀꿀거리고 덜그럭대는 서울에서
나도 움푹한 욕망 들고 뛰어가고
보름달 뜨면 먹고 싶어라
둥근 젖
움켜쥘 그때부터 나는 아귀였던가
부르도자가 움푹한 입 벌리며 굴러가고
기름진 돼지 머리가
웃고 있는 좌판 위의 서울
움푹해라 뒤뚱거리는 영혼도
밥숟갈을 닮았다
죽어서도 배가 부르게 해주십사
거위 주둥이를 벌린다 *
* 칸나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현무암 돌담 아래 피어 있던 칸나, 그 붉은 꽃을 본 후로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도 쓰려고 애쓰다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 칸나 속으로 들어가서 칸도 없고 나도 없는 칸나의 마음으로 말이다. 칸나!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글이 이렇게 갑자기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붉은 칸나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날, 무슨 일인지 내 혓바닥은 고름들로 퉁퉁 부어올라 있는 상태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나는 칸나를 보고 있었다. 시커먼 화산재들이 치솟고 뜨거운 용암들이 흘러넘치는 한라산 밑에서 나는 꽃 붉은 칸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굳어버린 불의 돌, 현무암, 그 거무스름한 돌담 아래 피어 있던 칸나의 붉은 꽃, 오늘도 칸나에 대해 제대로 쓰지 못한 느낌이 든다. 다음에는 칸나에 대해 더 잘 쓸 수도 있겠지 *
* 천둥소리
뭉게구름 속의 저 고요는
137억 년 전
아니, 그 이전에도 있었던 고요
뭉게구름 속의 저 고요는
내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고요
절대로 죽지 않는 고요
그 고요의 만발처럼
떠 있는
뭉게구름 속에서
오늘은 천둥소리도
연꽃 속의 수줍은 심청이처럼
잠자고 있네 *
* 최승호시집[북극 얼굴이 녹을 때]-뿔
* 북어 (北魚)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 최승호시집[얼음의 자서전]-세계사
* 반딧불
눈썹 위에 침을 발라 반딧불을 붙이고, 그믐의 시냇가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던 푸른 눈썹의 아이들을 기억한다. 이제는 그 반딧불도 묘한 눈짓들과 이별한 눈썹들처럼, 사라져가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꽁무니의 푸른 불을 깜빡거리면서 그믐밤의 시내를 건너가는 반딧불 한 마리를, 그리움의 푸른 불빛으로 떠올려봄 직도 하다. 사람은 죽은 뒤에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49일 동안을 어떻게 보내는지 모르지만, 그런 중음(中音)도 헛것이길 바라고, 반딧불 같은 혼이 설령 명부(冥府)를 헤맨다 해도, 그 명부가 늘 그믐이 아니라 새벽으로 통해 있기를 바란다. 원숭이해가 지나가고 닭의 해가 시작되는 새해 첫날에, 금닭이 홰치는 새벽을 기다리며 이 글을 쓴다 *
* 나비
짐짝을 등에 지고 날거나, 헬리콥터처럼 짐짝을 매달고 날아가는 나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비는 바늘처럼 가벼운 몸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리고 무소속이다. 그래서 나비는 자유로운 영혼과 같다. 무소유(無所有)의 가벼움으로 그는 날아다닌다. 꽃들은 그의 주막이요, 나뭇잎은 비를 피할 그의 잠자리다. 그의 생은 훨훨 나는 춤이요, 춤이 끝남은 그의 죽음이다. 그는 늙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이 없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에도 그는 자유롭다 *
*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 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럽게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 회전문 속에 떨어진 가방
회전문 속에서 가방을 놓치고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와 가방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한 경험인가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온 여기가 후생(後生)이라면
가방 든 시절이 전생의 이승이었단 말인가
회전문 밖에서 떨어진 가방을 들여다본다
내용물은 별것도 아니지만
나 없으면 육신의 껍질이나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지금 잃는다면 아쉬움도 꽤 따를 것이다
장례식에는
산 자들이 억누르는 슬픔의 총체보다 더 큰
죽은 자의 고요한 슬픔이 뒤따른다 *
* 뭉게구름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
* 부르도자 부르조아
반이 깎여 나간 산의 반쪽엔
키 작은 나무들만 남아 있었다
부르도자가 남은 산의 반쪽을 뭉개려고
무쇠 턱을 들고 다가가고
돌과 흙더미를 옮기는 인부들도 보였다
그때 푸른 잔디 아름다운 숲 속에선
평화롭게 골프 치는 사람들
그들은 골프공을 움직이는 힘으로도
거뜬하게 산을 옮기고
해안선을 움직여 지도를 바꿔 놓는다
산골짜기 마을을 한꺼번에 인공 호수로 덮어 버리는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누군가의 작은 실수로
엄청난 초능력을 얻게 된 그들을 *
* 백만년이 넘도록 맺힌 이슬인생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
이슬이 걸리더라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
이슬이 걸리오
은하수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도 이슬이 걸립니까?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에 이슬이
걸리는군요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
뒷다리 *
* 오광수엮음[시는 아름답다]-사과나무
* 최승호 시인
-1954년 춘천 출생
-1977년 [현대시학] 등단.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2003년 미당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대설주의보][고슴도치의 마을][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