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이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 - 고영민
눈이 왔다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 너와 함께 걷는다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린 너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았고
말없이 다가와 팔짱을 끼워줬다
나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싸이프러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가끔씩 큰 눈보라가 일었다
우리는 뒤돌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바람이 잠잠해질 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나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때 너와 나의 머리칼과 눈썹, 털옷에는
눈가루가 얹혀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산사로 연결된 그 길가 나무의 이름이
싸이프러스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무는 그저 거대하고 의연했다
그 큰 나무는 가끔씩 가지에 얹혀 있던
무거운 눈덩이를 털어내곤 했다
걷는 동안 우리는 자그마한 소리로
거꾸로 자라는 나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이 겨울, 허공에 뿌리를 두고
땅속으로 땅속으로 끝없이 가지를 뻗으며
진초록의 잎새를 늘리고 있는
땀 흘리는 나무에 대한 얘기였다
땅속으로 새들이 날고
그 푸른 허공으로 빗줄기가 쏴, 하고 쏟아질 때에도
나는 몇번씩이나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고
새의 발자국 같은 흔적들이 그 위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가끔 나는 등뒤에서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걸어온 길을 돌아다봤다
소실점처럼 어떤 것으로부터 나무도, 너와 나도
점점 멀어져가고
너도 나처럼 그 길의 후미를 몇번이고 돌아다봤다
그곳엔 몇백년을 한곳에 서서
눈을 맞고, 말없이 얹힌 눈을 털어내고 있는
정오의 싸이프러스가 있었고
그 사이로 난 눈길이 있었다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
* 산등성이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흑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돌리고 앉아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모습, 잰걸음을 따라 나도 가만히 걷는다. 기세가 천 리를 갈 듯하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에이, 이 못된 할망구야,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야, 평생을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이 할망구, 뒤돌아 식식거리며 아버지 집으로 천릿길을 내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 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 고영민시집[악어]-실천문학사
* 눈과 황소
눈이 온다//
눈이 오는 산등성이에 황소가 묶여 있다//
황소는 묶여있고 눈이 온다//
황소의 큰 눈을 닮은 눈이 황소의 새끼를 친다//
눈은 그렁그렁 황소를 닮았다//
울음소리를 닮았다//
울음소리를 따라 황소를 닮은 함박눈이 온다//
어미를 따라온 어린 눈이 황소의 등에 얹힌다//
젖을 물듯 허공을 치받으며//
눈은 오고//
젖은 쇠방울 소리는 오고//
황소는 묶여 온종일 잔등에 얹힌//
제 새끼의//
흰눈을 턴다 *
* 아랫목
한나절 새끼 낳을 곳을 찾아 울어대던
고양이가 잠잠하다
잠잠하다
불을 지피려 아궁이 앞에 앉으니
구들 깊은 곳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가
야옹지다
오늘밤, 이 늙은 누대(累代)의 집은 구들 속
새끼를 밴 채 진통이 심하겠다
불 지피지 마라
불 지피지 마라
냉골에 모로 누워 식구들은 잠들고
나 혼자 두렷이 깨어
바닥에 귀대노라면
내 귀 달팽이는 감잎처럼 커졌다가
연잎처럼 커졌다가
쉿, 누가 들을까
어미는 발끝을 든채 새끼를 물어
눈 못 뜬
자리를 옮기고 또,
자리를 옮기고
* 즐거운 소음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
*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
* 수필
씨감자는 반을 잘라서 묻지
자른 곳에 검은 재를 발라서 묻지
그리고 잊어먹지
공들여 잊어먹지
이마를 짚어주고 가던 손을 잊지
옆의 흙을 가져와 묻어주던 시간을 아예 잊어먹지
아니, 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잊어먹지
눈매에서 싹이 오르지
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싹이 오르지, 꽃이 피지
잘려나간 반을 흙속에서 생각하지
눈감고 오래도록 생각하지
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만 공들여 생각하지
그 사이 반이 하나가 되지
공들여 하나가 되지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마음 가는대로
열이 되지 *
대낮, 골방에 쳐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 (짧은 침묵)
계란 한 판... (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 (침묵) ...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친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
* 고영민시인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2002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악어][공손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