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남준 시 모음

효림♡ 2010. 12. 16. 10:26

* 먼 강물의 편지 - 박남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 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

* 박남준시집[적막]-창비

 

* 따뜻한 얼음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
* 박남준시집[적막]-창비

 

* 적막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

 

* 나른한 오후  

꽃의 눈부심에 갇혀 자괴에 빠졌다

새들의 창공에 매여 악을 쓰기도 했다

이십이었을 때, 삼십이었을 때

 

꽃을 바라보다 내 얼굴을 만져보네

새들의 하늘을 올려보다 걸어온 발등을 바라보네

이제 그만 나른해져야겠네 *

 
* 봄 편지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

 

* 깨끗한 빗자루  

세상의 묵은 때들 적시며 씻겨주려고  

초롱초롱 환하다 봄비
너 지상의 맑고 깨끗한 빗자루 하나 

* 박남준시집[적막]-창비 

 
* 독탕 
언 개울물 풀려 흐르자
앞산과 뒷산 우르르 겨우내 묵은 때를 씻겠다고
달려와 얼굴 비춰보려는데
어랏 혼자 다 차지하고 아예 몸을 담그고 있는
저 젓- 쬐끄만 녀석
퐁당 톡 도토리 한 알 *
 

* 최대의 선물   

꽃이 피어나는 건

당신을 향한 내 사랑 때문이다

지금 별똥별이 반짝이는 건

이 밤 당신께 보내는 연분홍 편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산들이 푸른 숲으로 샘물을 품고 있는 것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인생의 나침반을 삼으라고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선물인 것이다 *

 

* 바람에 실어  
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미는 이미 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 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 피워올리니 따듯한 불기가 간절하구려


보구 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듯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느니 어디 한 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 박남준시집[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문학동네

 

* 흰 부추꽃으로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꺽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

 

* 취나물국  

늦은 취나물 한 움큼 뜯어다 된장국 끓였다. 아흐 소태, 내뱉으려다 이런, 너 세상의 쓴맛 아직 당당 멀었구나.입에 넣고 다시금 새겨

빈 배에 넣으니 어금니 깊이 배어나는 아련한 곰취의 향기  

 

아, 나 살아오며 두 번 열 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얼마나 잘못 저질렀을까. 두렵다 삶이 다하는 날, 그때는 또 무엇으로 아프게 날 치려나 *

 

* 쉰   

그리움도 오래된 골목 끝 외딴 감나무처럼 낡아질 수 있을까

흘러온 길이 끝나는 곳 세상의 모든 바다가 시작되는 그 곳

밤새 불빛 끄지 않고 뒤척이며 깜박이는 등대 같은 것 *

 

* 봄날은 갔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작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번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 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랬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두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은 섬진강가 잔물결마져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 박남준시집[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 사랑 

직박구리가 찍ㅡ 하고 울었다

흰 해당화 한 송이를 와자지끈 꺾었기 때문이다


소나무 한 그루 우두둑 가장 굵은 팔을 꺾었다

누군가 군불도 없는 찬방에 새우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그대를 위해 붉은 목숨을 내놓으리라

그런 날이 있었다 *

* 박남준시집[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 가게   

하동에서 구례 사이 어진 강물 휘도는 길

비바람 눈보라 치면 공치는 날이다

집도 없고 포장마차도 없는 간이 휴게실이 있지

고물 트럭을 개조해 만든

재첩 국수와 라면, 맥주와 소주와

음료수와 달걀과 커피 등등

전망 좋고 목 괜찮아 오가는 사람들 주머니가

표 나지 않고 기분 좋게 가벼워지는 동안

눈덩이 같던 빚도 갚고 그럭저럭 풀칠도 하는데

빌어먹을

그 아저씨의 그 여자는 암에 덜컥 발목을 잡혔다

 

소원이 있었댄다 꿈 말이지 웃지 말아요 정말이라고요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밤무대에 서는 가수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깊이 모자를 눌러쓴 그 여자는

아저씨를 졸라 간이 휴게소 아래

얼기설기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선풍기도 난로도 아니 전등도 하나 없는

간판도 없는 두어 평 비닐하우스 무허가 옷 가게

어려서나 더 젊어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반짝이는 반짝이 옷

너울너울 인형 같은 공주 옷을 파는 옷 가게

그녀에게서 사온 옷을 안고 잠을 청하면

푸른 섬진강 물이 은빛 모래톱 찰랑찰랑 간질이는 소리

동화 속 공주가 나타나는 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구례에서 하동 사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옷 가게

그녀가 웃고 있다 *

* 박남준시집[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박남준 시인
-1957년 전남 법성포 사람 

-1984년 시 전문지 [시인] 등단

-시집으로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적막][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무산 시 모음  (0) 2010.12.24
이시영 시 모음   (0) 2010.12.20
첫눈 시 모음  (0) 2010.12.07
고영민 시 모음  (0) 2010.11.15
최승호 시 모음  (0) 201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