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백무산 시 모음

효림♡ 2010. 12. 24. 08:53

*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 - 백무산 
그대에게 가는 길은 봄날 꽃길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좋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이어도 좋다
비바람 폭풍 벼랑길이어도 좋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그대는 그곳에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이어도 좋다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이어도 좋다
왁자한 저자거리 진흙길이어도 좋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꽃을 들고도 가겠다
창검을 들고도 가겠다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

모든 길을 열어두겠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일 수 없다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

 

* 재로 지은 집 
아름답기로 소문난 오래된 그 절
나와는 금생 인연이 딱 한 발짝 모자라
어떨 땐 눈뜨고 일없이 차를 놓쳤고
어떨 땐 차를 타고도 폭설에 갇혀 못 간 그 절
남의 인연 하나 억지 빌려 겨우 닿았을 때
절은 이미 한 발짝 앞에서 불길 속으로
훌훌 벗고 떠나가고 없었네
재로 지은 절 한 채 벗어두고

아쉬워할 건 뭔가,
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덜컹,
밖이 나오네

서러워할 건 뭔가,
본래 자리에 돌려주어

산에 청산에 가득한
재로 지은 절

그 절 만나고 오는 길
눈이 밝아져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네
재로 된 돌부리였네 *

 

* 동해남부선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서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정말,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 옆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예전에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삼양라면에  일 다녔댔지
우산을 돌려주러 갔던 자취방 앞에서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

 

* 연꽃  

저리 맑다 싶은 연못도

땅이 흔들리고 바람이 불고 물이 들고나면

가라앉은 흙탕 일어 물이 흐리다

 

지친 몸은 쉬게 해야 한다

소란스런 정신은 쉬게 해야 한다

소음기 없는 발동기를 단 영혼은 쉬어야 한다

가라앉아 맑은 눈 비칠 때까지

자신의 영혼을 한동안 쉬도록 명령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용히 살 수만은 없다

핏발 선 눈빛을 거둘 수 없다

세찬 바람 잘 날 없고 생존은 예고 없이 침범당한다

우리가 쉬는 사이 어둠은 차올라온다

 

쉼없이 나아가 꽃을 피워라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밀려드는

진흙탕과 쓰레기와 함께 파리가 끓는 자리에

눈물과 피와 좌절의 구역질나는 골짜기에

강한 눈빛 하나 피워라 *

 

* 침묵 
나무를 보고 말을 건네지 마라
바람을 만나거든 말을 붙이지 마라
산을 만나거든 중얼거려서도 안된다
물을 만나더라도 입다물고 있으라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이름 없는 들꽃에 이름을 붙이지 마라
조용한 풀밭을 이름 불러 깨우지 마라
이름 모를 나비에게 이름 달지 마라
그들이 먼저 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인간은
입이 달린 앞으로 말하고 싸운다
말없는 등으로 기대고 나눈다 *

 

* 세한도

왜 그렸을까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앞서 그랬을까

목수가 보면 웃을 그림을 그렸을까

풍수가 보면 혀를 찰 집을 그렸을까

 

늙은 소나무 부리 위에 집을 짓다니

숲 그늘 습한 땅에 터를 잡다니

방위도 살피지 않고 지형도 살피지 않고

주위 땅이 더 높아 비만 오면 물이 콸콸

집 안으로 쏟아질 참인데

 

그는 아마도 유배지의 겨울 솔숲을

다 그려놓고는 못내 집이 그리워

집 한 채를 끼워넣었던 것일까

그런데 저 집은 살림집이 아니지 않은가

이상하게 크고 긴 건물과 낯선 문

궁궐일까, 그가 그리워하던 것은 옛 영화였을까

임금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면 왜

 

저리 기막힌 소나무아래

저리 한심한 집을 생각했을까

그는 두 가지 욕망에 괴로워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저런 욕망이 깊이 깔린

그림을 그렸을까 *

 

* 손님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엔 주먹만 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쩐지 그가 보고 싶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몸을 숨겨 찾아온 벗들의 피묻은 발자국인 양

국경을 넘어온 화약을 안은 사람들인 양

곧 교전이라도 벌어질 듯이

눈 덮인 산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거세된 내 야성에 피를 끓이러 왔는가

세상의 저 비루먹은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하다

더 이상 목숨의 경계에서 피 흘리지 않는

문드러진 발톱을 마저 으깨버리려고 왔는가

누가 날 데리러 저 머나먼 광야에서 왔는가 

눈 덮인 산은 칼날처럼 고요하고

날이 선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을

뚝뚝 떨구며 그는 어디로 갔을까 *

 

* 백무산시인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지옥선] 발표,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 수상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초심][길 밖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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