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완영 시 모음

효림♡ 2011. 1. 14. 23:06

* 山이 나를 따라와서 - 정완영   

桐華寺 갔다 오는 길에 산이 나를 따라와서   

도랑물만한 피로를 이끌고 들어선 茶집   

따끈히 끓여 주는 茶가 丹楓만큼 곱고 밝다 

 

산이 좋아 눈을 감으신 부처님 그 無量感   

머리에 서리를 헤며 귀로 외는 楓岳 소리여  

어스름 앉는 黃昏도 허전한 情 좋아라 

 

친구여, 우리 손 들어 작멸하는 이 하루도  

天地가 짓는 일들의 풀잎만한 몸짓 아닌가  

다음 날 雪晴의 銀嶺을 다시 뵈려 또 옴세나 *

 

* 초봄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 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 낸다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빛도 닦으리 *

 

* 적막한 봄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이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

 

* 설화조(說話調)   

내 만약 한 천년전 그 세상에 태어났다면

뉘 모를 이 좋은 가을날 너 하나를 훔쳐 업고

깊은 산 첩첩한 골로 짐승처럼 숨을 걸 그랬다

 

구름도 단풍에 닿아 화닥화닥 불타는 산을

나는 널 업고 올라 묏돌처럼 숨이 달고

나는 또 내 품에 안게 달처럼 잠들 걸 그랬다

 

나는 범 쫓는 장한(壯漢) 횃불 들고 산을 건너고

너는 온유(溫柔)의 여신(女神) 일월(日月)에나 기름 부어

한 백년 꿈을 누리어 청산에 살 걸 그랬다 

 

* 아침 한 때 
참 희한도 한 일이다 이도 가을의 몸짓일까
궁전(宮殿)만한 잠을 누리어 아침 꿈이 깊었더니
그 무슨 수런거림에 놀라 잠을 깨었다

한 그릇 세숫물에도 가을은 와 닿는 건데
지난 밤 귀를 적시며 영(嶺)을 넘던 서리 하며
이 아침 쏟어져 오는 저 무리새 울음 소리

창을 열고 물 뿌리고 소제하고 뜰에 나리니
무너질듯 무너질 듯이 물이 들어 장중한 나무
그 너머 우람한 하늘이 빛을 쌓고 있어라

가을새 울음소리는 듣다 문듯 놓치는 것
저 동녘 원초(原初)의 불을 이끌어다 올려 놓고
어느 새 먼 산 숲으로 자리 뜨고 없구나

 

* 조국(祖國)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 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둘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蓮과 바람 
옛날 우리 마을에서는 동구 밖에 연蓮밭 두고

너울 너울 푸른 연蓮잎을 바람결에 실어두고
마치 그 눈 푸른 자손들 노니는 듯 지켜봤었다 

 

연蓮밭에 연蓮잎이 실리면 연蓮이 들어왔다 하고

연蓮밭에 연蓮이 삭으면 연蓮이 떠나갔다 하며
세월도 인심의 영측盈仄도 연蓮밭으로 점쳤었다 

 

더러는 채반만하고 더러는 맷방석 만한

직지사直指寺 인경 소리가 바람 타고 날아와서
연蓮밭에 연蓮잎이 되어 있는 것도 나는 봤느니 

 

훗날 석굴암 대불大佛이 가부좌하고 앉아

먼 수평 넘는 이 저승의 삼생三生이나
동해 저 푸른 연잎을 접는 것도 나는 봤느니 

 

설사 진흙 바닥에 뿌리박고 산다 해도

우리들 얻은 백발도 연잎이라 생각하며
바람에 인경 소리를 실어 봄즉 하잖는가 *

 

* 분이네 살구나무  

마을에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마을에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

 

* 창포꽃

돌 한 개 던져 볼까

아니야

그만둘래

 

바람 한번 불러볼까

물잠자리 잠을 깰라

 

창포꽃

포오란 생각이

오월 못물을 열고 섰다. *

 

* 을숙도(乙淑島)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 리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대밭 베고 질펀히도 누워 있데.


그래서 목노주점엔 한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잔을 낙일(落日) 앞에 받아 놓으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노사공(老沙工)도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김해 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데. *

 

* 부자상(父子像)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 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쳐 드릴 제 마음 없사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 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릴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날 그때의 아버님를 닮습니다. *

 

* 추청(秋晴)

필시 무슨 언약이 있기라도 한가부다

산자락 강자락들이 비단 필을 서로 펼쳐

서로들 눈이 부시어 눈 못 뜨고 섰나부다


산 너머 어느 산마을 그 언덕 너머 어느 분교(分校)

그 마을 잔칫날 같은 운동회 날 갈채 같은

그 무슨 자지러진 일 세상에는 있나부다

 

평생에 편지 한 장을 써본 일이 없다던 너

꽃씨 같은 사연을 받아 봉지 지어 온 걸 봐도

천지에 귓속 이야기 저자라도 섰나부다 *

 

* 상실의 노래  

그 옛날 고향 마을은 고목나무에 걸려 있었네

내가 띄운 가오리연도, 하늘 가는 흰 구름도

해질 녘 나를 부르는 울 어머니 목소리도.


휘영청 둥근달도 고목나무 가지 위에

북두칠성 별자리도 고목나무 가지 위에

새벽빛 동트는 하늘도 그 위에서 밝아 왔었네.


가지에 걸어 둔 노래는 비바람이 걷어 가고

휘어진 고목나무는 먼 하늘이 데려가고

세월이 두고 간 그림자 저만 혼자 지쳐 누웠네. *

 

* 만 냥 빚 갚은 하늘 
녹음도 짐이던가
지친 여름 다 부리고

산국(山菊) 감국(甘菊) 쑥부쟁이
흩어 피는 이 가을은

만 냥 빚
다 갚은 하늘을
이고 길 나섭니다. *

 

* 정완영(鄭椀永)시조시인

- 1919년 경북 금릉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현대문학 추천 등단  한국문학상(11회), 가람문학상(1회), 중앙시조대상(3회), 육당문학상(5회)수상

-시조집[採春譜][산이 나를 다라와서][오동잎 그늘에서서][시조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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