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오세영 시 모음 2

효림♡ 2011. 1. 20. 10:16

* 문 밖에서 - 오세영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당신이 계신 곳을 찾으려고 
  나는 
  꽃의 문 앞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당신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ㅡ꽃의 문을 열자 향기가 있었습니다. 향기의 문을 열자
바람이 있었습니다. 바람의 문을 열자 하늘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문을 열자 빛이 있었습니다. 빛의 문을 열자 무지개
가 있었습니다. 무지개의 문을 열자 비가 내렸습니다. 비의
문을 열자 나무가 있었습니다. 나무의 문을 열자 다시 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나는 항상 당신의
  문밖에 서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문밖에
  서 있습니다 *

 

* 초록별

해오라기, 뜸부기, 물떼새 모두 떠나고
강물조차 얼어붙은 겨울 어스름

빈들엔
갈대 홀로 어두운 하늘을 향해
낡은 하모니카를 분다
허수아비, 허수아비
마른 어깨너머 하나, 둘 돋아나는
초록별 *

 

* 꽃은 시들고 
꽃은 시들고
물은 마르고
깨진 꽃병 하나
어둠을 지키고 있다

아, 목말라라
금간 육신
세시에 깨어 자리끼를 찾는
꽃병은 귀가 어둡고

세상은 저마다의
꽃들이다
깔깔 웃는 백일홍
킬킬 웃는 옥잠화

세시에 깨어
귀를 모으는
금간 꽃병 하나 *

 

* 제자리  

급류(急流)에
돌멩이 하나 버티고 있다
떠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안간힘 쓰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떠가는 꽃잎처럼
풀잎처럼
흐르는 물에 맡기면 그만일 텐데
어인 일로 굳이 생고집을 부리는지
하늘의 흰 구름 우러러보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서 그런다 한다
이제 보니 계곡의 그 수많은 자갈들도
각자 제 놓일 자리에 놓여 있구나   
일개 돌멩이라도

함부로 옮길 일이 아니다 
뒤집을 일도 아니다 *
 

* 오세영시집[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랜덤하우스코리아

 

* 속구룡사 시편 (續龜龍寺詩篇) 

한철을 치악稚岳에서 보냈더니라
눈 덮힌 묏부리를 치어다보며
그리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빈 가지에 홀로 앉아
하늘 문 엿보는 산까치같이

한철을 구룡龜龍*에서 보냈더니라
대웅전 추녀 끝을 치어다보며
미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흰 구름 서너 짐 머리에 이고
바람길 엿보는 풍경風磬같이

그렇게 한철을 보냈더니라
이마에 찬 산그늘 품고
가슴에 찬 산자락 품고
산 두릅 속눈 트는 겨울 한철을
깨어진 기와처럼 살았더니라 *

*구룡사龜龍寺-치악산에 있는 고찰

* 오세영시집[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랜덤하우스코리아

 

* 목련꽃 1

드디어 활짝 피었구나

어쩌란 말이냐

나의 사람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데

푸른 꽃그늘에 앉아 이 봄날을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지난 겨울밤

등피를 밝혀 쓰던 편지는

끝내

전할 사람이 없고

두견새는 밤새 저리 울고 봄비는

강물 되어 흐르더니

드디어 활짝 피었구나 뜰의

백목련 한 쌍

네가 없는 봄을, 이 푸른 꽃그늘의 대낮을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드디어

목련은 활짝 피었는데 *

* 오세영시집[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랜덤하우스코리아

 

* 목련꽃 2

매화처럼

오는 봄을 기다릴 순 없다는 것이냐

 

복사꽃잎처럼 분분히 흩날리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갈 수는 없다는 것이냐

 

와르르 무너지는 벗꽃처럼 그렇게

미련 없이 갈 수는 없다는 것이냐

 

이별의 고통보다 차라리

죽음의 축배를 드는 연인처럼

 

화려한 봄의 절정에서 처연하게

목숨을 던지는구나, 목련!

 

꽃에게도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정녕

너를 두고 일컬음이니

 

이 아침 고운 흙에 털썩 쓰러지는 네 육신을 두고 나는

화려한 봄의슬픔을 애도한다

 

* 귓밥 
내가 잠든 사이

아내는 몰래
나의 귓밥을 판다
어둡고 좁은 坑(갱)의 막장에서
한 알의 보석을 캐듯
비밀을 캐는 그녀의

거칠어진 손
무엇이 궁금했을까
나의 조루(早漏)는 불면 탓인데
나의 폭음에는 원인이 없는데
아내여
더 이상 귓밥을 파지 말아다오
내 보석은 이미
네 손가락의 반지에서 빛나고 있다
귀를 막고 사는

어두운 시대의 시인
귓밥이 없다 *

 

* 지상의 양식 
너희들의 비상은
추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새여
알에서 깨어나
막, 은빛 날개를 퍼덕일 때
너희는 하늘만이 진실이라 믿지만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는
비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진흙 밭에 뒹구는
낱알 몇 톨
너희가 꿈꾸는 양식은
이 지상에만 있을 뿐이다
새여
모순의 새여 *

 

* 모순의 흙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흙, 그릇 *

 

* 무명연시(無明戀詩) 64 -꽃씨를 묻듯

꽃씨를 묻듯
그렇게 묻었다
가슴에 눈동자 하나
독경을 하고 주문을 외고
마른 장작개비에
불을 붙이고
언땅에 불씨를 붙였다
꽃씨를 떨구듯
그렇게 떨궜다
흙 위에 눈물 한 방울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
목선(木船) 하나 삭고 있는데

꽃씨를 날리듯

그렇게 날렸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

 

* 미명(未明)

소낙비가 난초 잎을 두드린다

심금을 울리며

닫혀 있는 사물의 문을 연다

소낙비가 번개를 몰고

잠든 흙을 깨우고 있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비에 적시며

가냘픈 줄기로 미명(未明)을 열고 있다 *

 

* 기러기 행군

하늘 전광판(電光板)에 

문자 뉴스 몇 줄 떠오르며 스쳐간다 

겨울 전선(戰線) 급속히 남하 중 

지나가던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

 

* 언제인가 한 번은 

우지마라 냇물이여,
언제인가 한 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우지마라 바람이여,
언제인가 한 번은 버리는 것이란다.
계곡에 구르는 돌멩이처럼,
마른 가지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삶이란 이렇듯 꿈꾸는 것.
어차피 한 번은 헤어지는 길인데
슬픔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청솔 푸른 그늘 아래 누워
소리 없이 흐르는 흰 구름을 보아라.
격정에 지쳐 우는 냇물도
어차피 한 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 

 

* 1월 
1월이 색깔
이라면
아마도 흰색
일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
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
하는
눈부신 함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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