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면우 시 모음

효림♡ 2011. 1. 25. 21:24

*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로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 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

 

*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 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 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 줘야 할 저녁이 있다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에 실어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다
그러나 그 저녁이 다 가도록
나는 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 *

 

* 구름 만드는 남자 

흰 구름과 쌀밥은 닮았다 어려서
구름이 자꾸 몸 바꾸다 돌연 사라지는 걸
꿈꾸듯 지켜보는 내게, 아버지
너, 게으르면 힘든 밥 먹는다 
  
보일러 점화 삼분 뒤 굴뚝을 본다
탄산가스와 습증기로 된 흰 구름이 뭉게뭉게
차가운 하늘 속으로 반듯이 올라간다
내가 만든 구름 참 많이 흘러다닐 하늘 저편에 대고
가만히 불러보았다, 아버지
  
저는 지금 구름이
밥이 되는 기적을 만나는 중이에요 *

 

* 화염 경배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

 

* 거미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무서운 버드나무 

이른 봄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뱉어낸다
회초리 가지 산들바람에 낭창낭창대다
해바라기씨 기총소사하듯 다다다다 뱉어낸다
아니다. 버드나무는 참새떼 한 번 빨아들일 때마다 꼭
한마리씩 삼키는 거다 옛 이야기 속 냇둑 산발한 여자
술 취한 남자 홀랑 벗겨 냇물에 떠내려보낸다는
무서운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휘이익 뱉어낸다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간다 

 

* 그 숲 속 작은 새들 

내가 늘 그렇듯 명상 속에

상수리나무 아카시아 우거진 숲 오솔길 갈 때

쬐그맣고 알록달록한 새 두 마리 돌연히 나타나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분주히 자맥질하며

천지간의 종언이듯 까까까깍 울부짖다

내 머리까지 달락말락, 작은 몸뚱이를

번개같이 던져 내려오곤 하였다 

어제 그제 숲 속은 묵묵하더니

오늘 나는 작은 새들에게 여지없이 쫓겨

잔뜩 웅크리고 내달려 산등성이로 기어올랐다

거기서 어두워지기 시작한 숲을 보며

귀기울여 엿듣는 한 때, 작은 새들

멀어지는 울부짖음 사이로 가늘고 높고

여린 소리가 숲의  우듬지께 황금빛 테를 두른

저녁 무렵 잠깐 밝은 하늘로 솟구쳤다

아아, 이제야 알겠구나

그 숲 속 작은 새들 오늘 새끼를 부화시킨 것

그래 제 몸을 던져 둥지를 지키고 있구나

따스한 물기 같은 전율이 등골을 타고 내렸다

그래 그래, 사는 거다

누구라도 온몸으로 살아야 하는 거다

끝내는 조용해진 상수리나무, 아카시아 우거진

오솔길 두고 오늘 나는 가시에 찔리고 넝쿨에 긁히며

잡목숲 뚫고 이만큼 돌아 산을 내려왔다 *

 

* 두더지 
비 갠 아침 밭두둑 올려붙이는 바로 그 앞에
두더지 저도 팟팟팟 밭고랑 세우며 땅 속을 간다
꼭 꼬마 트랙터가 땅 속 마을을 질주하는 듯하다
야, 이게 약이 된다는데 하며 삽날 치켜들다 금방 내렸다
땅 아래 살아 있다는 게 저처럼 분명하고 또
앞뒷발 팔랑개비처럼 놀려 제 앞길 뚫어나가는 열정에
문득 유쾌해졌던 거다 그리고 언젠가 깜깜한 데서 내 손 툭 치며
요놈의 두더지 가만 못 있어 하던 아내 말이 귓전을 치고 와
앞산이 울리도록 한번 웃어젖혔다 *
* 이면우시집[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 소쩍새 울다   

저 새는 어제의 인연을 못 잊어 우는 거다
아니다, 새들은 새 만남을 위해 운다
우리 이렇게 살다가, 누구 하나 먼저 가면 잊자고
서둘러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아니다 아니다
중년 내외 두런두런 속말 주고 받던 호숫가 외딴 오두막
조팝나무 흰 등 넌지시 조선문 창호지 밝히던 밤
잊는다 소쩍 못 잊는다 소소쩍 문풍지 떨던 밤 *

 

* 봄밤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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