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젊은 시 모음 3

효림♡ 2011. 1. 10. 21:32

* 우체통 - 이용한 

자고 나면 생이  

슬퍼진다  

쓸데없는 편지를 부치고  

우체통처럼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세월은  

우편배달부처럼 지나간다 *

 

* 하룻밤 - 김휘승 

눈먼 밤에도 꽃피우는 나무야 환하지  

꽃빛 아득해질 때까지 넓게 살지  

 

꿈자리까지 접는 밤  

잠결에도 꽃피우는 하룻밤 *

 

* 화내고 있다 - 이성미  

꽃에게 화내고 있다

풀에게 화내고 있다

깃털을 집어 던지며

지푸라기를 집어던지며

발을 구르면서 *

 

* 진눈깨비 2 -죽은 벗에게 - 황인숙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

 

* 어두운 일산 - 김정환 

한 사내가 사랑을 잃고 우울한

일산 쪽이 온통 어둡다

 

내 길눈은

그렇게 이어지고 길을 지운다 

 

한 여자가 사랑을 잃고

더 우아한

일산 쪽이 온통 슬프다

 

내 길눈은

그렇게 끊어지고 길을 품는다 *

 

* 함박눈 - 고창식 

높고 높은 저 하늘은

멀고도 먼데 

흰 눈을 내리시네 

꽃을 피시네

넓고 넓은 이 세상은

아득도 한데 

솜이불 내리시네 

자릴 펴시네 

깊고 깊은 산마을은

고요도 한데 

자장갈 부르시네 

아길 재시네 *

 

* 지붕 위로 흘러가는 방 - 이영주 

한밤중에 지붕은 머리에 둥근 달을 이고 허공으로 걸어간다 

어릴 적 나를 업고 프라이팬에 노란 달을 부치던 어머니

비린 달을 게워내며 옥탑방이 지붕 위로 흘러간다 *

 

* 반성 100 - 김영승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검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

 

* 반성 608 - 김영승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 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 주신다 *

 

* 사랑은 - 이정하  

내 가진 잉크로는 그릴 수 없네  

그대가 떠나고 난 뒤  

시커멓게 탄 내 가슴의 숯검정으로  

비로소 그릴 수 있는 것 *

 

* 하루 - 이정하 
그대 만나고픈 마음 간절했던  
오늘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내일도 여전하겠지만
난 정말이지 소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하루가 지나면
당신과 만날 날이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기를
이 하루만큼 당신께 다가가는 것이기를


그대 만나고픈 마음 간절했던
오늘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

 

* 동안거(冬安居) - 고재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
 

 

* 잔말은 물에 묻고 - 석지현   

잔말은 물에 묻고

푸른 잎 무성한 저 소리로
그대와 같이라면 왜 못 가리오 *

 

* 참 놀라운 봄 - 문인수 

나는 올해도 이 골목 두 번째 모퉁이를 돌자마자 "앗, 깜짝이야." 하고 놀란다. 놀란 척이라도 한다. 그러면 키 큰 목련나무는 정말 번번이 놀란다. 어느 날 갑자기 핀 흰 꽃 무더기, 흰 꽃 무더기가 한꺼번에 화들짝, 놀라번지는 거다 *

 

* 외딴 산 등불 하나 - 손택수 
저 깊은 산속에 누가 혼자 들었나
밤이면 어김없이 불이 커진다
불을 켜고 잠들지 못하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누군가의 불빛때문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불빛때문에 외눈으로
하염없이 글썽이는 산
그 옆에 가만히 등불 하나를 내걸고
감고 있는 산의 한쪽 눈을 마저 떠주고 싶다 *

 

* 마흔다섯 - 이영광  
어쩌자고, 사람을 해쳐 쫓기다 깨어난 새벽
오그라든 집은 세상 끝의 은신처거나 감옥이다
살생도 도주도 숨음도 다 이
땀에 젖은 몸뚱이가 어둔 밤에 저지른 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수감생활이요
깎지 못할 형량이다 *

 

* 겨울 아침 - 박형준  
뜰에 부려놓은 톱밥 속에
어미 개가 강아지를 낳았다
햇살이 터오자 어미 개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다리 힘 없어 비틀거리는 새끼들을
혀로 세웠다
톱밥 속에 어미 개가
강아지를 낳은 겨울 아침
이쪽으로 쓰러지려 하면
저쪽으로 핥는 어미 개의
등허리에 서리가 반짝였다
서리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

 

* 파문 - 권혁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비채

 

* 봄이 오면 - 맹주상 

강 마을에  

봄이 오면  

 

보리밭에는  

서릿발이  

고꾸라지는 소리 

 

밭고랑마다 

종종걸음

 

보리 새순 

달래는 소리 *

 

* 달을 삼킨 개구리 - 신천희(소야스님)  
연못에 빠진
동그란 달을
통째로 덥석
집어 먹은 개구리 
 
공짜 좋아 하다가
큰일이 났네 
 
너무 커서
삼키지도 못하고
아까워서
도로 밷지도 못하고
 
목구멍에 걸려
눈이 볼록 튀어 나왔네

 

* 정년퇴직 - 반칠환 

한평생
그를 싣고 다니던 자전거가
문간에 선 채 녹슬고 있다
쓸만한 안장과
멀쩡한 두 바퀴가
저녁 햇살을 쏘아올리면서
보란 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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