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시영 시 모음

효림♡ 2010. 12. 20. 09:10

* 詩 - 이시영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 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

 

* 어느 향기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는

매서운 겨울 내내

은은한 솔향기 천 리 밖까지 내쏘아 주거늘


잘 익은 이 세상의 사람 하나는

무릎 꿇고 그 향기를 하늘에 받았다가

꽃 피고 비오는 날

뼛속까지 마음 시린 이들에게

고루고루 나눠 주고 있나니 *

 

* 아버지의 모자

  아버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

이시영시집[바다 호수]-문학동네, 2004

 

* 빛

내 마음의 초록 숲이 굽이치며 달려가는 곳

거기에 아슬히 바다는 있어라

뜀뛰는 가슴의 너는 있어라 *

 

* 새벽

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캬 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 먼동 트는 소리 *

 

* 범종 소리  
머리를 들고 풀숲을 가르는 배암의 착한 배처럼
허공을 향해 차고 오르는 새들의 무서운 발자국처럼
먼 산굽이를 돌아 나가는 꽃상여의 은은한 요령 소리처럼
내 놀던 모래사장에 슬리는 외로운 조가비의 낮은 탄식처럼 *
  

 

* 물결 앞에서 

울지 마라
오늘은 오늘의 물결이 다가와 출렁인다
갈매기떼 사납게 난다
그리고 지금 지상의 한 곳에선
누군가의 발짝 소리 급하게 울린다

울지 마라
내일은 내일의 물결 더 거셀 것이다
갈매기떼 더욱 미칠 것이다
그리고 끓어 넘치면서

세계는 조금씩 새로워질 것이다 *

 

* 사이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 *

 

* 화살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

 

* 애련(哀憐)

이 밤 깊은 산 어느 골짜구니에선 어둑한 곰이 앞발을 공순히 모두고 앉아

제 새끼의 어리고 부산스런 등을 이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겠다 *

 

* 그에게 묻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자유다."
고향 크레타 섬에 있는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명이다. 과연 그랬을까?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은 오로지 에개해를 가르고 나아가는 첫 돛단배처럼 자유 그 자체였을까? *

 

* 눈이 부신 날에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나는 문득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 옛날 우리가 새로 태어났던 날의 초록잎새처럼
아직은 푸르름이 채 가시지 않았을
당신의 맑은 얼굴을 *

 

* 귀가  

누군가의 구둣발이 지렁이 한 마리를 밟고 지나갔다

그 발은 뚜벅뚜벅 걸어가

그들만의 단란한 식탁에서 환히 웃고 있으리라

지렁이 한 마리가 포도에서 으깨어진 머리를 들어

간신히 집 쪽을 바라보는 동안 * 

 

* 김사인의 흰고무신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폭우 속을 뚫고 김사인이 왔었고 흰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새로 막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천둥 소리 속에 밖에서 누가 희미하게 나무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설연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송기원과 나의 처가 거센 빗줄기 속에서 기세등등 들이닥치고 있었다. "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바로 그때였다.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
  

 

* 밤

밤은 먼 들의 바람을 몰고 와

십오층 빌딩의 옥상에 부려놓는다

거세게 부딪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나는 빈 들로 나아가

한 마리 성난 사랑이 되고 싶다

그러나 밤은 가슴에 더욱 큰 바람을 안고 와

다시 한번 난간을 들이받고

피 흘리며 들판을 헤매다가

새벽녘 가장 강한 폭풍이 되어

그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빛나는 눈동자를 태어나게 한다 *

 

* 달밤에

기러기 식구들 줄지어 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내외 손자

땅 위엔 사위는 모닥불빛

재처럼 뜨거웠던 얼굴들이여

 

기러기 식구들 하나둘씩 줄지어 난다

어제 떠난 동료의 흰옷 그림자를 좇아

밤새도록 펄럭이는 포장을 차며 *

 

* 무지개

그 옛날 제가 어렸을 적

웃냇가 노둣돌 틈서리에서 물장구치다

느닷없는 천둥 소나기에 놀라 벌거숭이로

들 가운뎃길을 향해 냅다 뛰었을 때

바로 옆 밭에서 김매다 갑자기 없어진 나를 찾아

어머니는 가름젱이 온 들판을 호미 들고 다 헤매셨다면서요?

들판 가득 무지개 곱게 피어오르던 그 훈훈한 여름저녁 *

 

* 건망증 

송기원이 '실천문학' 주간으로 정신없을 때  그는 멀
쩡한 제 명함에다 문구 형님 집 전화번호를 찍어 다녔
다. 덕분에 문구 형님 집에선 밤이나 낮이나 걸려오는
그놈의"송기원씨 좀 바꿔주세요"라는  천하  술꾼들의
전화질 때문에 생몸살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보다 더 심한 경우가 당시 중앙일보 문학 담당 임재걸
씨였다. 그는 수시로 그런 송기원에게 전화를 걸어 "거
기 임재걸씨 있습니까?"라고 물어 그때마다 그를 깜짝
깜짝 놀라게 했다며 그에 비하면 자기는  정말 아무것
도 아니라고 송기원은 펄쩍 뛰면서 얘기하는 것이었다 *

 

* 마음의 고향 4 -가지 않은 길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애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 번 걸을 수 있을까

 

* 마음의 고향 6 -初雪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

* 이시영시집[사이]-창비

 

* 이시영(李時英)시인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6년 정지용문학상, 1998년 동서문학상 수상

-시집 [만월][바람 속으로][은빛 호각][긴 노래, 짧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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