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우대식 시 모음

효림♡ 2010. 10. 18. 08:10

* 나무늘보처럼 - 우대식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먹겠다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눈뜨고
눈 감겠다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사랑하고 사랑을 버리겠다
나무늘보처럼 세월을
둥글둥글 말아가겠다
나무늘보처럼
나무 위에서 풍찬노숙의 생을 보내겠다
깊은 밤 새소리 들리면
천천히 하늘 향해 노래부르겠다
나무늘보처럼 *

 

*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아내의 가슴에서

못 자국 두 개와 일곱 개 선명한 선이

발견되었다

못 자국 두 개의 출처는 내 분명히 알거니

빗살무늬 상처는 진정 알지 못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해변에서 보낸

나날들의 기록인가 생각해보았다

혹 주막에서 보낸 내 생을

일이 년 단위로 가슴 깊이 간직한 탓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생의 싸움터를 헤매인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저의 가슴에 저토록 선명한 상처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가

나 바다에서 죽음을 꿈꾸었을때

그는 지상에서 죽어갔던 것 *

 

* 무애(無碍)에 관한 명상

개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 손을 핥는다
한참을 그러다가
무애(無碍)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벌판에 내리는 눈 속에
한순간 개의 혓바닥도
내 손도
그나저나 그도 나
오늘 겨울 강을 건너는
한 마리 짐승이라 생각되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무어라 짖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 없고
눈 속에 파묻힌 그의 네 발을
핥아보고 싶은 것이다 *

 

* 소풍

귓속에 재봉틀 소리가 산다

야적장에 함박눈 내리는 밤

재봉틀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누워 자는 내 어린 가슴 위로 굴러간다

엄마가 발 구르는 소리였던 것

반야심경 구절구절이 흘러가는 소리였던 것

온 땅과 온 하늘이 맞서는 밤이었을 거다

양철 함지박에 눈 쌓이고

플라스틱 챙에 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엄마와 재봉틀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머언 소풍을 가던 것

그곳에서 아주 살았던 것 *

* 우대식시집[단검]-실천문학사

 

* 겨울 나그네 
너구리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논길을 걸어간다
멈칫 나를 보고 선다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다
그 평행의 보폭 가운데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
고여 있다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
해거름에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하는 중이다
시골 개들은 이빨을 세우며 무리진다
넘어서지 말아야 할 어떤 경계가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직감이다
그가 털을 세운다
걸음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나도 안다
지구의 한켠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

 

* 눈(眼) 
콩밭 지나 뒤란
쪽문 앞에 앉은 고양이
눈에서 가을 떡갈나뭇잎이 부스럭댄다
정점으로 박힌 아우성은 서서히 소진되어
흔들림없이 무언가 응시할 뿐
서리내린 갈대밭을 기어
집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노을 하나
본다
털에 세운 모든 촉각들은
눈(眼)으로 가는 길고 먼 회로(回路)
어두운 길 위에 쏟아지는 피묻은
울음 하나
눈(眼) 속에 처연히 울고 서 있다 *

 

* 그 사이

햇살이 부르튼 초봄 강가에서
햇살과 여울 사이
눈이 부셔 눈조차 뜰 수 없는
그 사이
당신과 나의 따뜻한
얼음 이불 한 채
잠든 당신은 영 깨지를 않고
눈 먼 사내가
순은(純銀)의 비단길을 걸어가는
햇살과 여울
그, 사이 *

 

* 詩人

헛되고 헛되다
내 안의 포도주가 헛되고
밤거리의 주막도 헛되다
원주에서 신림으로 가는 첩첩 산도 헛되고
폭풍 전야의 저 구름도 헛되다
어린 날 시골 분교의 방과 후
슬프고 깊은 풍금 소리 양식 삼아
시인이 되었지만
한낱 떠도는 자의 운명으로 태어났으니 헛되다
하여
내 안에 먼 기슭을 돌아와 헤엄치는 물고기도 헛되다
숨도 안 쉬고 저 강과 산을 건너고 싶다 *

 

* 노을 

우리 집 개가
막내 놈이 콩밭에 눈 똥을
훌떡 삼켜버렸다
그리고 내게로 와서
맨발로 핥았다
걷어차지 못했다
물리치지 못했다
부르르 떨고 있는 늦가을 목련나무를
한참 쳐다보았을 뿐
옆에 서 있는 미친 대추나무에
막걸리 서 되 받아주고 나도 한잔 마셨다 *
* 우대식시집[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천년의 시작

 

* 오리(五里) 
오리(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

* 우대식시집[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천년의 시작

 

* 우대식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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