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그리운 날 - 최하림

효림♡ 2010. 10. 15. 08:05

* 그리운 날 - 최하림 

이렇게 연민들이 사무치게 번쩍이는 날은

우리 강으로 가, 강 볼까, 강 보며 웃을까 * 

 

* 가을, 그리고 겨울  

깊은
가을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들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

* 최하림시집[속이 보이는 심연으로]-문학과지성사 

* 저녁 바다와 아침 바다 
광산촌의 여인은 보고 있었다 물에 뜬 붉은 바다
날빛 새들이 날아오르고 물결에 별들이
씻겨져 제 모습으로 갈앉고
상수리나무가 한 그루 흔들리고 있었다
키작은 사내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일천 피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으나
가도가도 막막한 어둠뿐 모두 다 뜨내기와 갈보뿐
낡아빠진 궤도차가 달리는 길목에서
어허와어허와 궤도차가 달리는 길목에서
우리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
불렀으나, 신참내기 전도사도 노래불렀으나 가슴의
멍울은 풀리지 않고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슬픔만 달빛이 내리는
나무 그늘이라든가 산등에서 아주 낮게
흘러내리고 어떤 적의도 없이 흘러내리고
밤이 가고 아침이 오고
새들 무리가 무의미하게 날아오르고
물결에 흔들리는 여인의 얼굴 위로
상수리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

 

* 아침 시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해만 뜨면 솟아오르는 일을 한다

늘 새롭게 솟아오르므로 우리는

굴참나무가 새로운 줄 모른다

굴참나무는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고 안 보이는

나라로 간다 네거리 지나고 시장통과

철길을 건너 천관산 입구에 이르면

굴참나무의 마음은 벌써 달떠올라

해의 심장을 쫓는 예감에 싸인다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산란한 꿈에서

깨어나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검은 숲 위로

오른다 볼이 붉은 막내까지도 큼큼큼

기침을 하며 이파리들이 쏟아지듯 빛을

토하는 잡목 숲 옆구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오른다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은 용케도 피해 간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다

그곳에서는 새들과 무리지어 비행할

수가 있다 그들은 종다리처럼 혹은

꽁지 붉은 비둘기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포르릉포르릉 날며 흘러

내리는 햇빛을 굴참나무처럼 느낄 수 있다. *

 

* 겨울산

그 해도 다 간  12월 초순 서울에서는 포근하고  새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우리는 눈길을 걸어 도선사로 명동으로 갔습니다. 도선사 모퉁이를 돌면

소나무 숲 저편으로 절간의 풍경들이 떼그르르 떼그르르 울고 고딕풍의

명동 성당에서도 성모 마리아님이 휜 이마를 들고 우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제 슬픔을 슬퍼하지 못한 우리를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님이여 죄가 있으므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죽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죽음에서 살고 있습니까?  고다마의 어머니

마야님이여, 당신의 아들이 집을 나간 뒤로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이 세상에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저 먼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수만 명도 넘는

잘 생긴 아들들이 행방불명되었다가 얼마 전 시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수만 명도 넘는 어머니들이 시체를 맞아 들였다고 합니다.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님이여, 고다마의 어머니 마야님이여,

이런 날은 아들의 그리며 전태일의 어머님도 어느 길을 걸어가고 김남주의

어머님도 갈 것 입니다. 이런 날은 아무 죽음도 가지지 못한 저나 제 친구들도 갑니다.

나무들이 언 가지로 서 있고 차고 신선한 공기가 샘물처럼 흘러서,

수만 리도 더 멀리 뻗어가고 수만 리도 더 높이 솟아오릅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겨울산으로 끝없이 솟아오릅니다.

 

* 춘분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도 추워서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이 떨어지며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얼음이 깨지고 버들가지들이

보오얗게 움터 올랐다 아이들은 강 언덕에서 강아지야 강아지야

노래 불렀다
  나는 다시 왜 이리 봄이 빨리 오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지난 일이 

마음 쓰여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 최하림시전집-문지

 

* 어디로 ?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저녁 예감 
한로가 지나면
화원에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염소들이 서성거리고
돌밭으로는 물안개가 몰아오고, 검푸른
하늘이 바다 깊이 내려와 모습을
감춘다 발도 보이지않게 어스름이
나무들 사이를 지나 수채 구멍 같은
골짝으로 내려간다 나는 빠르게
밭고랑을 걸어 집으로 간다
퐁당퐁당 시간들이 떨어지고
빈집들이 숨을 죽이고
골목이 두런거린다 *

 

* 공중을 빙빙 돌며

공중을 빙빙 돌며

새 한 마리 머뭇거리다가

버드나무 가지에 내려앉는다

순간 이파리들이 동요하고

미닫이문이 열렸다가 닫히면서

햇살이 물밀듯 들어온다

미닫이를 통해 보면

햇살을 받아들이는 건 새도

버드나무도 들녘도 아니고 그 아래

일파만파로 파동을 일으키며 흘러가느

가을 강과 가을의 기억들, 수초들

눈여겨보면 어린 날의 물거미들도

파동을 타고 어디로인지 이동해간다

모든 것들이 간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강을 본다

여전히 물거미들은 이동하고

구름이 모여드는지 산기슭에서는

나무들이 흔들리고 새는

버드나무 위에 있다 가을에는

물물이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 *

 

* 저녁 바람은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저녁 바람이 베란다를 넘나들며 논다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저녁 바람이 복도 끝으로 달려 갔다가 복도

끝으로 달려오며 논다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설거지하는 사람도  없어서 덜커덩덜커덩

거지하며 논다 


그리고 저녁 깊이 어둠이 깔려오면 저녁 바람은 어둠 속으로 들어

가 어둠이 되어 논다 *

 

* 내린천을 지나

내린천을 지나 인제로

미시령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졌네

꿈도 꾸지 않았네

한줄기 별똥별도

흐르지 않았네

캄캄한 잠 속을 헤매고 헤맨 뒤

또르르또르르 물소리 같은 소리가

계속 귓바퀴를 울려 나는 일어났네

물소리 같은 소리가

집을 울리고

나무도 새도

울렸네

가을은

각각의

집으로 돌아가

울고 있었네

지붕 위로 떼 지어 어스름이 달렸네

검은 바위들이 어둠에 잠겼네

아무것도 나는 알 수 없었네

경(經) 한 장 읽을 수 없었네 *

 

*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더 이상 종달이는 높이 날지
않는다 봄날은 지나가버렸다
긴 의자에 사람들 오지 않고
시간은 주춤추춤 고장난 시계처럼
흘러간다 나는 창문을 빠끔히 열고
시간의 자국들을 보고 있다
이태리 포플러들이 강 건너 연푸른
가지를 드러내며 가지런히 있다
무슨 신호를 공중으로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오오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멈칫거리지 말고 말하라 바람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날개에는 솜털 같은 은유들이 실려 있고
은유들은 희망도 없이 부서져내린다
들판은 멀고 멀다 개울로 흘러가는
물들은 병들었다 수세기를 두고
오염된 세상은 이제 종달이 하나
떠올릴 힘이 없다 *

 

* 집으로 가는 길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

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

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

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

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

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 고요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

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 내 고요를

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

 

* 침묵의 빛

  뽀오얗게 새순이 돋아나는 봄날 마로니에 공원에는 병아리 같은 유치원 아이들이 하나 둘 하나 둘 소리하며 줄지어 걸어가고

나도 뒤를 따라서 걸어가고 사방의 나무들이 소리없이 하나 둘 하나 둘 그들의 소리로 외치면서 그들도 따라서 가고,

그런 움직임은 봄과 여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가을 되어 아이들 그림자도 뜸해지고

은행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도

그러나 나무들은 하나 둘 하나 둘

그들의 소리로 그리운 듯 되풀이하다가

눈이 내리고 하늘이 언 날

가끔 한 여자가, 한 남자가 허무처럼

서 있던 날 나무들도 침묵을 하고서

침묵의 빛으로 서 있었습니다. *

* 고규홍저[나무가 말하였네]-마음산책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 시 모음 2  (0) 2010.10.15
젊은 시 모음 2   (0) 2010.10.15
가을 시 모음 3  (0) 2010.10.11
조정권 시 모음  (0) 2010.10.11
이종문 시 모음  (0) 201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