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장석남 시 모음 3

효림♡ 2010. 9. 20. 08:17

* 오막살이 집 한 채 - 장석남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

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잎이라든가

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

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한 채 짓자고 앉아 있

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

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이렇게 떨리지만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멀군요 이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이 내 평생 일인 줄 누가 알까요 *

 

* 묵집에서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진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 

 

* 서쪽 1 - 가도 가도 서쪽인... 이홍섭 구(句)

 쩍ㅡ 갈라지는 부엌문 여는 소리. 개는 겨우 앞발 버티고 등을 치켜올려 기지개를 켜지만 알고 보면 그놈은 주인인지

객인지 구분도 없는 놈, 그저 찐 감자 껍질이나 얻어먹으러 오는, 제 친구 막내나 된다는 듯 다시 마룻장 밑으로 들어가고

 

허기진 창자를 삐뚜름히 비추는 저녁별

노는 아지랑이

 

솥을 열다

 

서쪽을 열고

뺨에 서쪽을 빛내다 *

 

*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한 덩어리의 밥을 찬물에 꺼서 마시고는 어느 절에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처마 끝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 거룩해지고 뒤란 언덕에 보랏빛 싸리꽃들

핀 까닭의 하나쯤은 알 듯도 해요 

 

 종소리 그치면 흰 발자국을 내며 개울가로 나가 손 씻고 낯 씻고 내가 저지른 죄를 펼치고

가슴 아픈 일들을 펼치고 분노를 펼치고 또 사랑을 펼쳐요 하여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의

다른 하나를 알아내곤 해요 *

 

* 어느 해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을 권해 받았으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종소리가 온다 어느 절에서 오는지 모른다 나는 슬며시

방문을 밀고 나와 앉는다 좀더 맑게 온다 이게 몇번째인가?

나는 하던 일도 없어지고 해야 할 일도 없어진 채 그저 좀

더 앉아 있기로 한다 맛좋고 영양 많은 횟감용 생굴장수가

지나가는 그 위에 또 한번 종소리 덩ㅡ하고 울려온다

 

어느해 봄 불 타기 전 낙산사 뒷방에 얼마쯤 머물자고 청

했을 때 스님 한 분, 밥값으로 종두*일을 권했으나 그만 못

하고 말았는데 이제 와 후회한다

 

꽃 같은 손을 만들어 종을 밀어 때리면

뜰에선 목단꽃도 피었을 테지

목단꽃 겹겹처럼 곱디고운 뉘우침도 많았을 테지

 

후회는 기도를 낳고 나는

죽으면 동해에 움터오는 먼동이나 되어

어느, 밤 지새운 기도객의 맑은 눈자위에 불그스레 서려서

그를 보는 가슴을 아프게 할거야

그를 보는 가슴을 꽃 쥐듯 아프게 할 거야 *

*종두: 절에서 종 치는 일을 하는 사람

 

* 술래1 

신발 벗어놓고 꽃 속으로 들어간 매화 분홍

신발 벗어놓고 열매 속으로 들어간 살구 분홍

 

신발 벗어놓고 겨울 속으로 들어간 첫 서리의 분홍

 

신발장을 정리하며

지워지지 않는 분홍의 핏자국들을 만진다

 

나는 그 얼룩들의 술래였다 *

 

* 동지(冬至)
생각 끝에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간다

언 내(川) 건너며 듣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들
새 시(詩) 같은

어깨에 한짐 가져봄직하여
다 잊고 골짜기에서 한철
얼어서 남직도 하여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 또 있을까?
꽝꽝 언 시 한짐 지고
기다리는 마음
생각느니 *


* 요를 편다

요는 깔고 몸을 뉘는 물건

사랑을 나누는 물건

어느날 죽음을 맞는 물건

도가(道家) 풍으로

요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거니

매미 우는 삼복 한여름에도

요를 펴고 누워

하늘을 부른다

몸은 요를 부르는 물건

사랑은 요를 부르는 물건

죽음은 요를 부르는 물건

꽃을 펴듯 요를 편다 *

 

* 방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 낱 꿈은 물고기

처럼 총명히 달아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로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겹겹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 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는 들끓는 방이다 *

 

* 꽃차례 

조팝꽃이 피면 기침이 오지
오래된 내 몸뚱이의 관습
그맘때 한 이별이 있었지
허리를 쥐며느리처럼이나 굽히고
쇤 기침을 쏟고 나면 이른 노을이 잔칫집 같았지


조팝꽃이 지나가면 모란이 오지
자줏빛 옛이야기 같은 모란이 오지
이마 뜨거운 이 있을 거야
혼이라도 가슴 싸늘한 이 있을 거야
모란을 보면서 미워한 이가 있었거든
허나 모란은 일찍 지는 꽃


어느 아침 나는 서운히 서서
모란이 있던 허공 언저리를 더듬어보지
점잖은 호수와도 같이
후회는 맑고
꽃이 피고 지는 사이
모든 후회는 맑아
다시 한차례 살아오르는
꽃 소식 *

 

* 바위그늘 나와서 석류꽃 기다리듯  

바위 곁에 석류나무 심었더니

바위 그늘 나와서는 우두커니

석류꽃 기다리네

 

장마 지나 마당 골지고

목젖 붉은 석류꽃 피어나니

바위는 웃어

천년이나 만년이나 감취둔 웃음 웃어

내외하며 서로를 웃어

수수만년이나 아낀

웃음을 웃어

 

그러니까

세상에 웃음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울음도 생겨나기 이미 전부터

 

둘의 만남이 있었던 듯이

우리 만남도 있었던 듯이 *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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