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가을 시 모음 2

효림♡ 2010. 9. 7. 08:35

* 빈의자 - 문태준  

 걀쭉한 목을 늘어뜨리고 해바라기가 서 있는 아침이었다
그 곁 누가 갖다놓은 침묵인가 나무 의자가 앉아 있다
해바라기 얼굴에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박혀 있다
태양의 궤적을 좇던 해바라기의 눈빛이 제 뿌리 쪽을 향해 있다
나무 의자엔 길고 검은 적막이 이슬처럼 축축하다
공중에 얼비치는 야윈 빛의 얼굴
누구인가?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지그시 쓸어내린다
가을이었다
맨 처음 만난 가을이었다
함께 살자 했다 *

 

* 가을길 - 조병화 
맨 처음 이 길을 낸 사람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간 사람은
지금쯤 어디를 가고 있을까
이제 내가 이 길을 가고 있음에
내가 가고 보이지 않으면

나를 생각하는 사람, 있을까
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길은 이어지며
이 가을
어서 따라오라고
아직, 하늘을 열어놓고 있구나 *

 

* 가을 편지 - 김영천  
드나는 손님을 위해 한 쪽 문이라도 늘 열어두었으나 어제의 비로 급 강하한 기온이 나를 꼭꼭 걸어 잠그게 합니다 이제 마지막이라며 코스모스 꽃길을 가자던 사람들이 몸을 움추리며 꽃 다 저불었겄다야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은 지난 세월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종류이건 바람이야 늘 횡행하던 것 아닙니까 삼십 촉 백열등 하나라도 켜 두면 훈훈했던 시절이며 홍시 두어 개면 금방 서로 마음을 나누던 여유며 그나마 우리를 지켜온 것은 손바닥만한 사랑이었더니 훼절한 연인처럼 함께 우루루 피어났다가 이제야 서둘러 떨켜를 닫고 뚝뚝 지는 이들을 문득 기억해냅니다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제 상처를 다 가리우며 스러지는 하루의 끝처럼 지는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꽃잎 대신
바스락거리며 타는 것들의 향기를
조금 담아 보냅니다 *

 

* 구월의 시 - 함형수

하늘 끝없이 멀어지고

물 한없이 차 지고

그 여인 고개 숙이고 수심(愁心)지는 구월

기러기떼 하늘가에 사라지고

가을 잎 빛 없고

그 여인의 새하얀 얼굴 더욱 창백하다

눈물어리는 구월

구월의 풍경은 애처로운 한 편의 시(詩)

그 여인은 나의 가슴에 파묻혀 우다 *

 

* 9월 - 이외수

가을이 오면
그대 기다리는 일상을 접어야겠네
간이역 투명한 햇살 속에서
잘디잔 이파리마다 황금빛 몸살을 앓는
탱자나무 울타리
기다림은 사랑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밀려드나니
그대 이름 지우고
종일토록 내 마음 눈시린 하늘 저 멀리
가벼운 새털구름 한 자락으로나 걸어 두겠네

 

* 9월 바람나다 - 임영준

진홍 꽃판 이슬에
농염한 하늘이 맺혀있었어요
함초롬한 가을 봉오리에
풍만한 바람이 가슴을 부비고요

무르익은 고추잠자리는
상대를 가리지 않더군요
게다가 정염에 불타는 감들은
파과만 꿈꾸고 있고요

무화과나무아래에선
괜스레 속살이 떨리더라니까요

 

* 9월과 뜰 - 오규원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

 

*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說)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
 

* 9월에 부르는 노래 - 최영희 

꽃잎 진 장미넝쿨 아래
빛바랜 빨간 우체통
누군가의 소식이 그리워진다

망초꽃 여름내 바람에 일던

굽이진 저 길을 돌아가면
그리운 그 사람 있을까

9월이 오기 전 떠난 사람아

지난해 함께 했던 우리들의 잊혀져 가는
그리움의 시간처럼
타오르던 낙엽 타는 냄새가
올가을 또한 그립지 않은가

가을 오기 전
9월
9월에 그리운 사람아 *

 

* 가을 기도 - 허영자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뜨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먼 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 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

 

* 내린천에서 - 김영래

당신 품에 들기 위해 이제는 당신의 그림자 안에 다가섭니다
시월,그늘진 자리는 어느덧 싸늘하군요
지난 여름 몇 차례 범람에 시리도록 날을 벼린 물이 두가슴 사이 으늑한 골을 따라 흐르고

하늘이 담겨 미어지는 여울에서 그리움의 아득한 얼굴을 봅니다
얹힌 곳을 풀어 내릴수록 넓어지는 하심(下心)의 자락에서 나무들은 일제히 잎을 털고,더 버릴 것 없는 마음
웅숭깊은 자리에서 한 해의 나이테를 손끝으로 더듬어 쥡니다
사랑하는 이여
날이면 날마다 산 그림자로 무너져 오는 이여
이제 내 나이 마흔으로 주름져 오는 물결에 당신이 있고 당신의 그림자가 있고 그 그림자 안에 내가 있습니다(.....)

*(내린천에서 부분) 

 

* 가을날 - 김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

 

* 가을길 - 김종해

한로 지난 바람이 홀로 희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가을
서오릉 언덕 너머
희고 슬픈 것이 길 위에 가득하다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
모자를 털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제 그림자를 지우며
혼자 가는 가을길 *

 

* 가을 저녁의 말 - 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

 

* 가을서정 - 노향림

경비행기들이 일직선으로 사라진 하늘가에
스사스사 아으아으 쇳소리를 내며
숨차게 주저앉은 가을
그들은 모두 어디로 쉬엄쉬엄 흩어져 갔을까
담그늘 밑에 까부라져 뒹구는 수레국화 몇점
입술에는 침 마른 하이얀 자국들이
얼룩으로 붉은 물 들었다
그 곁 일렬로 늘어선 갯쑥부쟁이 입술에도
붉은 얼룩물 들었다
오랜만에 이 빠지고 눈 시린 길 버리고
어디 낯선 괴로움의 나라로 갔을까
혹시는? *

 

*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 강연호시집[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 가을 -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  

 

* 가을(秋夜月) - 삼의당 김씨

月兩地照 - 일월양지조 - 달 하나 두 곳을 비춰주건만

二人千里隔 - 이인천리격 - 두 사람 천리를 떨어져 있네

願隨此月影 - 원수차월영 - 청산에 바라건대 이 달빛 따라

夜夜照君側 - 야야조군측 - 밤마다 밤마다 그대 곁을 비추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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