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후기 시 모음

효림♡ 2010. 8. 23. 08:37

* 사랑의 물리학 -상대성 원리 - 박후기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

 

* 제석봉에서 이별하다  

산처럼

사랑도 오르는 일보다 내리막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죽은 나무들 사이로

당신이 떠난 후 깨닫는다

엎질러진 물처럼

사랑은 발 아래 스며든다

땀 흘리며 묵묵히 오르던

늦가을 벽소령

당신에게 건네던 물과

함께 쏟아진 마음을

다시 담을 수 없었다

물 한모금으로

더운 가슴 적시며

무거운 짐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하지만, 좁은 외길

함께 걸을 수 없었다

어째서

모든 뒷모습은

눈 앞에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 국수

 늦은 밤

눈 내리는 포장마차에 앉아

국수를 말아먹는다

국수와 내가

한 국자

뜨거운 국물로

언 몸을 녹인다

얼어붙은 탁자 위에서

주르륵

국수 그릇이 미끄러지고

멸치국물보다

싱거운 내가

나무젓가락의 가랑이를 벌리며

승자 없는 싸움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부침개처럼

술판이 뒤집어진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막차가 도착하기 전

미혹에 걸려 넘어진 마음

다시

일으켜세워야 한다

 

* 북어

퇴직금으로 구입한 1톤 트럭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비쩍 마른 북어 한 마리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며

 

 강변북로를 빠져나간다

 

 작정이라도 한 듯

 

 꼬인 실타래로 칭칭

 

 트럭 운전대에 제 몸을 묶고

 

 강바람 거슬러

 

 거친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죽어도 눈 감지 않겠노라고

 

 안구건조증에 걸린

 

 북어 한 마리

 

 희멀건 두 눈 부릅뜨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 

 
* 자반고등어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
 

* 묵

주점 홍등 아래 앉아

묵을 먹는다

청춘을 잃고 뒤늦게

연약을 매만지는 법을 배운다

잡힐듯 말 듯

의심 많던 손아귀에서 끝내

부서져버린 첫사랑을 생각한다

움켜쥔다고 가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탕진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오늘이 아니었으므로

돌아갈 여자도

도망칠 내일도 없던 날이었다

다시, 교문 앞에 돌아와

묵을 먹는다

젓가락질은 여전히 서툴고

정든 화실 앞에서

첫사랑은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제 살을 베는 칼날

묵묵히 받아들이며 쓰러진

묵을 먹는다 어느덧

뜨거운 가슴 식어버려

몸에 칼이 들어와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나를 먹는다

 

* 소금쟁이 사랑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소금쟁이처럼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물 위를 걸어다녔지만

당신은 가끔

파문 같은 미소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가슴으로 만나고 싶었기에

나는 젖은 손발 슬그머니

거두어들였습니다

가슴으로 당신을 만나자마자

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두 번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 고통 한 근 
산수(山水) 분재원
이끼 낀 유리창 너머
여린 나뭇가지에
돌멩이 하나 매달려 있다
수형(樹形)을 바꾸기 위해
수형(受刑)의 짐을 지운 것인데
기묘한 과일 같은 것이
팽팽한 줄에 목을 걸고
온몸으로 가지를 당기고 있다
전족을 한 키 작은 나무들
자꾸 허리만 굵어지는 봄날
휘어진 나뭇가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고통 한 근 *

 

* 양계장의 밤 
우리들의 밤은
당신들의 낮보다 밝아요
태양보다 밝은 전구가
머리 위에서 빛날 때
우리는 불빛과 섹스를 나누고
전구를 닮은 알을 쏙쏙 낳지요
해가 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내일이 없다는 말과 같아요
슬픔은 항생제도 듣질 않아
우린 밤새도록 우울한 부리로
쇠창살 그림자를 쪼아대며
종(種)의 격리를 견디지요
밤이면 밤마다 모래주머니 속에
모래알 같은 시간을 넣고 삭히다
알을 낳을 수 없는 그날이 오면
우린 모두 끓는 기름 속
혹은
숯불 위로 몸을 던져
소신공양을 하지요 *

 

* 촛풀

새벽 광장에

장대비 내리고

풀들은 등을 구부린 채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대궁이 부러지고

잎이 찢겼다

피 흘리는 꽃잎을

짐승의 발굽이 거칠게

밟고 지나갔다

뿌리 뽑힌 풀 몇 포기

바람 속으로

질질 끌려갔다

어둠 속에서

풀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졌지만

광장 어디에도

저 혼자 남겨진

풀은 없었다

쓰러진 풀들이

젖은 몸 툭툭 털며

땅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다 *


* 미산
지도 깊숙한 곳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미산이 있다
그곳은 강원도의 내면(內面)
미월(未月)의 사람들이
검은 쌀로 밥을 짓고
물살에 떠내려가는 달빛이
서어나무 소매를 적시는 곳
나는 갈 곳 몰라
불 꺼진 민박에 방을 얻고
젊은 주인 내외는
버릇없는 개를 타이르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멍든 개가 물고 간
신발을 찾아
어둠속을 두지는 밤
미산에서는
좁은 개집에서도
으르렁거리며
푸른 별이 빛난다 *
 

* 박후기시집[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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