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엽서 - 장석주

효림♡ 2010. 8. 20. 13:25

* 엽서 1 - 장석주  

저문 산을 다녀왔습니다

님의 관심은 내 기쁨이었습니다

어두운 길로 돌아오며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지만

내 말들은 모조리 저문 산에 던져

어둠의 깊이를 내 사랑의 약조로 삼았으므로

나는 님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에 못 견딜 그리움들이 화약처럼 딱딱 터지면서  

불꽃의 혀들은 마구 피어나  

바람에 몸부비는 꽃들처럼  

사랑의 몸짓을 해보았습니다만  

나는 그저 산아래 토산품 가게 안 팔리는 못난 물건처럼  

부끄러워 입을 다물 따름입니다  

이 밤 파초잎을 흔드는 바람결에  

남몰래 숨길 수 없는 내 사랑의 숨결을 실어  

혹시나 님이 지나가는 바람결에라도  

그 기미를 알아차릴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

 

* 엽서 2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님을 향한 길로 들어선 것은
굳이 운명이라고 할 것까진 없겠습니다
길가에 널린 적의를 품은 돌멩이들
어두운 숲 속엔 맹금류의 사나운 눈빛은 번들거리지요
하지만 그 길로 나를 이끈 것은
내 의지와 힘보다 더 큰 어떤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때없이 스쳐가는 바람의 유혹에 빠졌다고
날 저물고 어둔 하늘 초록별의 손짓에 따랐다고
그 길을 에워싼 숲의 깊은 죄가 아니지요
님을 향해 가는 길은 내 기쁨이지만
시련과 수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많이 굶은 내 위장, 부족한 잠으로 늘 고단한
저 붉은 노을 속 주림과 쫓김의 거칠고 긴 내 행려
허물어진 몸뚱아리 마침내 병 도져 쓰러지면
서편 하늘 선회하는 까마귀들 더욱 까악 깍 거리겠지요
땡볕 걷히고 소슬한 어둠 내리는 이 저녁 한길가에
부은 발등 지나가는 바람에 식히며 묻습니다
이 길을 얼마나 더 가야 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 엽서 3

사랑은 노래처럼 의지를 앞질러
입술을 간질이며 지나갑니다
그걸 의지의 빈곤이라고 크게 낙담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랑의 속성이었지요
예전엔 사랑은 강철의 무지개라고 믿었지요
그건 황홀하게 아름답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마구 헝겊처럼 헤집어 놓는 위험한 것이라고요
사랑은 그렇게 위험한 것이 아니지요
남쪽 항구를 여행하다가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배들을 보고
저거다, 사랑은 저런 모습니다, 라고 소리쳤지요
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험란한 물길 몇 굽이 건너 황혼 속에 깊은 안식에 드는
저 배들과 같이, 조금은 깨지고 부서졌지만
늠름히 다음 향해를 꿈꾸며 깊은 잠에 드는
저 배들과 같이, 돌아와 님의 품에 잠들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은 노래처럼 내 의지를 앞질러
입술을 간질이며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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