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호박꽃 - 윤봉한

효림♡ 2010. 8. 31. 09:02

 

* 호박꽃 - 윤봉한  
휴일이면
한번 다니러온 차들로
골목골목이 빽빽한 좁은 마을 길
무심코 후진하다 호박덩굴을 밟았다
얼른 빠져나가려는데
어린 호박잎과 덩굴손이 함께 이겨져
타이어에 금세 초록 물이 들었다
어쩔 줄 몰라 차에서 내렸는데
짓이겨진 덩굴 건너
노란 등불 환하게
호박꽃 피어 있었다
모르는지 아는지
잘려 싫은 내색도 없이
짓이겨 남겨진 덩굴 건너편
그곳에서
예수처럼
부처처럼
어머니처럼
호박꽃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
 
* 어머니
문을 열면
내장 뜯긴 들짐승처럼
텅 빈 집
 
길게 목이 늘어진 양말 한 짝 구석에 버려져 있고 *
 
* 고등어
밥을 먹다가
나는 생각한다
젓가락을 든 손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고
나는 누구인가
식탁에 앉아
나무의자 삐걱거리는 나는
고등어를 먹다가
하얀 뼈가 다 드러날 때까지
거의 다 먹어가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의 식탁에 누워
살이 발리는 자 누구인가
나에게 온몸으로 살이 발리는 자 누구인가
머리도 지느러미도 없이 이렇게 저항도 없이
나에게 살이 발리는 자 누구인가
고등어 밥을 먹다가
거의 다 먹어가다가

문득
그만 생각을 멈춘다 *

 

* 기억 
이제
나에게
담겨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도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 있었나 보다

찻물이 비워진 뒤에도
찻잔은 오래 따뜻하다 *

 
* 윤봉한시집[붉은 꽃]-문학과 경계사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니의 화법 - 이정록   (0) 2010.09.10
시를 다 지우다 - 장석남  (0) 2010.09.10
엽서 - 장석주  (0) 2010.08.20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 - 김기만   (0) 2010.08.20
백제의 미소 - 김지헌  (0) 2010.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