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효림♡ 2010. 9. 29. 08:46

*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 숲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

 

*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

 

*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 빨래 너는 여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어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빗방울 셋이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 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르르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가 되었다. * 

 

빗방울 하나가 5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 

 

* 아무도 몰래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그 떨림을 만지고 싶네

빛을 향하여 오르는 따뜻한 그 상승의 감촉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그 떨림의 문을 열어보고 싶네 

 

문안에 피어 있을 붉은 볼 파르르 떠는 파초의 떨림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그 떨림에 별똥별 하나 던져 넣고 싶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추락의 별똥별을, 추락의 상승이라든가 추락의 불멸을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떨리는 추락의 눈썹에 빗방울 하나 매달고 싶네

그 빗방울 스러질 무렵이면

돌아오는 귀이고 싶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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