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향아 시 모음

효림♡ 2011. 2. 7. 08:36

*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 이향아    
이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나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용서할 수 없음에 뜬눈의 밤이 길고
나처럼 일어나서
불을 켜는 사람이 있나 보다

즐펀히 젖어 있는 창문께로 가서
목늘여 달빛을 들여마시면
태기처럼 퍼지는
가까운 기별

나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보다

용서받지 못할 일을 내가 저질렀나 보다

그의 눈물 때문에 온종일 날이 궂고

바람은 헝클어진 산발로 우나 보다

그래서 사시철 내 마음이 춥고

바람결 소식에도 귀가 시린가 보다 *

 

*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낙엽 마르는 냄새가 난다.

가을 청무우밭 지나서

상수리숲 바스락 소리 지나서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오소소 흔들리는

억새풀 얘기가 들린다

추억이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

그래서 마냥 그립다는 말이다.

지나간 일이여,

지나가서 남은 것이 없는 일이여.

노을은 가슴속 애물처럼 타오르고

저녁 들판 낮게 깔린 밥짓는 연기.

추억이라는 말에는

열 손가락 찡한 이슬이 묻어 있다. *

 

* 동행   
강물이여
눈 먼 나를 데리고 어디로 좀 가자
서늘한 젊음, 고즈넉한 운율 위에
날 띄우고
머리칼에 와서 우짖는 햇살
가늘고 긴 눈물과
근심의 향기
데리고 함께 가자
달아나는 시간의 살침에 맞아
쇠잔한 육신의 몇 십분지 얼마
감추어 꾸려둔 잔잔한 기운으로
피어나리

강물이여 흐르자
천지에 흩어진 내 목숨 걷어
그 중 화창한 물굽이 한 곡조로
살아 남으리

진실로 가자
들녘이고 바다고
눈 먼 나를 데리고 어디로 좀 가자

 

* 그것이 걱정입니다

짓밟히는 것이
짓밟는 것보다 아름답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흐르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흐르는 내 피를 허락하겠습니다
상처 속 흔들리는 가느다란 그림자
그 사람의 깃발을 사랑하겠습니다
천년 후에 그것이 꽃이 된다면
나는 하겠습니다
날마다 사는 일이 후회
날마다 사는 일이 허물
날마다 사는 일이 연습입니다

이렇게 구겨지고 벌집 쑤신 가슴으로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을는지 몰라
나는 그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

 

* 깊은 후회

공연한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품으면 소금이 되었다가
지긋하게 쓰다듬으면 정금도 될 텐데 
혼자 앓다 땀을 낼 걸 들쥐처럼 약았다 
그는 긴 터널을 지나
그는 질컥이는 수렁에 잠겨
울렁대는 멀미를 삼킬 것이다
문밖에 빗방울이 실로폰처럼 떨어질 때
나도 거기 맞춰 장단이라도 칠 걸
샛바람이 은근하게 흔들리는 동안 덩달아 흔들거릴 걸
쓸개가 있는 듯이 없는 듯이 끄덕거리는 
저 덩치 큰 나무들 나뭇가지들 
지금은 봄도 무더기로 질주하는 길목인데 
나 실없는 헛소리를 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갈수록 어리석다 

 

* 아지랑이가 있는 집 
집에는 내 부끄러운 풍속이 있다
밥통 같은
간장종지 같은
요강단지 같은
집에는 부스러진 내 비늘이 있다
머리카락 같은
살비듬 같은
집에는 내 아지랑이가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세어 보는 색깔
집에는 슬픈 껍데기 얼룩진 콧물
그보다 치사한 인정이 있다
집에는 내 냄새가
고집이 있다
앉아서 돌이 되는 집념이 있다 *

 

* 개망초꽃 칠월   
칠월 들판에는 개망초꽃 핀다 
개살구와
개꿈과
개떡과
개판 

'개'자로 시작하는 헛되고 헛된 것 중
'개'자로 시작되는 슬픈 야생의
풀꽃도 있습니다 

'개망초'라는


복더위 하늘 밑 아무데서나
버려진 빈 터 허드레 땅에
개망초꽃 여럿이서 피어나고 있다 
나도 꽃, 나도 꽃 
잊지 말라고
한두 해 영원살이 풀씨를 맺고 있다 

개망초 지고 있는 들 끝에서는
지평선이 낮게 낮게
흔들리고 있을 거다

 

* 그립구나, 진부한 것들 

정겨운 말들은 이미 낡았다
밥이니 집이니 하는 말들이 그렇듯이
어머니의 어머니로 이어지는 산줄기
산줄기의 등성이에 깃을 치는 자식이니 고향이니
그렇고 그런 것들
물보다 진하다는 피도
다그쳐도 끝끝내 진실 하나뿐이라는 오래된 사랑도
낡을 대로 낡았다 진부하다

세상에는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것들
뼈대니 골수니 눈물이니 하는
최후의 쑥굴형처럼
진신사리처럼
지긋지긋한 고집불통의 묵은 등걸 같은 것들이 있다
가치 있는 것들은 가치가 있다면서 자꾸만 되풀이하다가 쓰러진다
과속하는 세상에 살아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쓰러지지 않고 살아 있는
그립구나, 진부한 것들
진부한 말들은 대체로 진실하다 *

* 이향아시집[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고요아침

 

* 이향아(李鄕莪)시인

-1938년 충남 서천 출생

-1966년 [현대문학]지의 3회 추천을 받아 등단, 1998년 윤동주문학상 수상

-시집 [눈을 뜨는 연습(練習)][강물연가][꽃들은 진저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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