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매화 시 모음 2

효림♡ 2011. 2. 18. 09:14

 

* 매화 - 김치선 

은하수 별빛처럼

하얗게

열린 순간들

오늘토록 살아있어

아름답게

반짝이는 날들

들꽃처럼

들새처럼

오늘을 살리

오지 않은

내일일랑

걱정하지 않으리 *

 

* 매화 찬(讚) - 복효근  
가령
이렇게 섬진강 푸른 물이 꿈틀대고 흐르고
또 철길이 강을 따라 아득히 사라지고
바람조차 애무하듯 대숲을 살랑이는데

지금
이 강언덕에 매화가 피지 않았다고 하자
그것은, 매화만 홀로 피어있고
저 강과 대숲과 저 산들이 없는 것과 무에 다를 거냐

그러니까 이 매화 한 송이는
저 산 하나와 그 무게가 같고
그 향기는 저 강 깊이와 같은 것이어서
그냥 매화가 피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머, 산이 하나 피었네!
강 한 송이가 피었구나! 할 일이다

내가 추위 탓하며 이불 속에서 불알이나 주무르고 있을 적에

이것은 시린 별빛과 눈맞춤하며

어떤 빛깔로 피어나야 하는지와

어떤 향기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연습했을진대
어머, 별 한 송이가 피었네! 놀랄 일이다
벙긋거릴 때마다
어디 깊은 하늘의 비밀한 소식처럼이나 향그로운 그것을
공짜로 흠흠 냄새맡을 양이면
없는 기억가지를 다 뒤져서 늘어놓고
조금은 만들어서라도 더 뉘우치며
오늘 이 강변에서
갓 핀 매화처럼은 으쓱 높아볼 일인 것이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풍매화 - 하종오  
떠돈들 어떠리 떨어진들 어떠리
언제든지 떨어지면 움 돋겠지
진달래가 골백 송이 흐득흐득 울어도
풍매화는 바람 따라 날아다닌다
골짝에 죽어 있는 메아리를 살려내고
벌목꾼이 버리고 간 도끼소리 찾아내고
땅꾼이 잃어버린 휘파람도 찾아내어
그 덧없는 소리들 데불고 무얼 하는지
풍매화는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혼자서 싹틀 힘도 없으면서
어디든지 뿌리내리면 숲이 이뤄지겠지
풍매화는 득의양양 산맥을 날아다니지만
대포알 묻힌 땅 버릴 수 없고
녹슨 철조망 무심히 바라볼 수만 없어
머뭇거리니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진다
이제는 묻혀야지, 몸 바쳐야 할 자리는 여기 *

 

* 순천 찬새미골 청매화 - 정진규 

너를 원천봉쇄로 흡입한 빨판들이 이젠 안심하고 모두 몸을 열고 있었다 염치도 없이 모두 들키고

있었다 염치도 없이, 상처의 새살들이 도돌무늬로 만져지었다 허공 가득 上氣되어 象嵌되고 있었다

이제는 꽃일 뿐이었다 * 

 

* 매화를 치다 - 이영식   

노인정 뒤뜰 매화나무
꽃 피우고 열매를 꺼내 보이는 일이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네
할머니 할아버지들
화투 치며 내다보고 장기 두다 건너보며
눈도 털지 않은 매화나무에 눈도장 찍으시네
겨우내 잠자던 꽃망울 불러내어
매화를 치네

 

꽃이 피었다 진 뒤에도
마음은 종일 나무 그늘을 서성거리네
손자 녀석 불알 쓰다듬듯 매실을 키우시네
노인정 선반 위 유리병 안에서
파릇파릇
봄날의 기억들이 매실주로 익기도 전에
한 노인이 매화나무 뿌리 속으로 기어들어가셨네
아무도 울지 않았네
바람 불고 낙엽 지고 또 눈 내리는 날에도
난초 단풍 뒤집고 바둑 장기를 두었네
이별을 이야기하지 않았네

 

새봄, 겨우내 얼려두었던 눈물을 펼치네
잔설이 성성한 화폭 위에
다시 매화를 치네

 

* 매화 - 박정만 

  매화는 다른 봄꽃처럼 성급히 서둘지 않습니다. 그 몸가짐이 어느댁 규수처럼 아주 신중합니다.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은 가지 쪽에서부터 한 송이가 문득 피어나면 잇따라 두 송이, 세 송이, ..... 다섯 송이, 열 송이..... 이렇게 꽃차례 서듯이 무수한 꽃숭어리들이 수런수런 열립니다. 이때 비로소 봄기운도 차고 넘치고, 먼 산자락 뻐꾹새 울음소리도 풀빛을 몰고 와서 앉습니다. 먼 산자락 밑의 풀빛을 몰고 와서 매화꽃 속에 앉아 서러운 한나절을 울다 갑니다. * 

 

* 매화 - 정호승

퇴계 선생 임종하신 방 한구석에
매화분 하나 놓여 있다
매화분에 물 주거라
퇴계 선생 돌아가실 때 남기신 마지막 말씀
소중히 받들기 위해
매화분에 매화는 피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통장에 돈 찾아라
한 마디 남기고 죽을까봐 두려워라
낙동강 건너 지구에는
오늘도 한창 꽃이 피고 있다
도산서원 매화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는가
새들은 꽃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은 나를 보고
죽더라도 겨울 흰 눈 속에 핀
매화 향기에 가서 죽으라고
자꾸 속삭인다  


* 매화 - 한광구 

창가에 놓아둔 분재에서

오늘 비로소 벙그는 꽃 한 송이

뭐라고 하시는지

다만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여네

이쪽 길인가요?

아직 추운 하늘문을 열면

햇살일 찬바람에 떨며 앞서가고

어디쯤에 당신은 중얼거리시나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 하나가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이쪽 길이 맞나요?

 

* 붉은 매화, 흰 동백 - 김종제   

눈 손님 맞은 금둔사
짙은 속눈썹 같은 납월매에
마음 하나 걸어놓고
속 마구 휘젓는 뱃길 따라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는
지심도 흰 동백 찾아간다
세상에 눈감고 귀막고
때로는 저렇게 낯설게, 초연하게
한곳으로 무작정 달려들다가
불 같은 그대에게 닿아
살이 다 타버리거나
물 같은 그대에게 빠져
뼈가 모두 흩어지거나
마침내 순교의 날이 온 것처럼
목 매달리는 것도 좋겠다
붉은 마음에 흰 피로
이 산, 저 들녘을 적셔
눈 휘둥그렇게 뜬 구경꾼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병 같은
봄을 옮겨주는 것도 괜찮겠다
절 안의 불 같은 매화에
섬 바깥의 물 같은 동백에
때로는 저렇게 분하게, 처절하게
꽃 같은 비명을 내지르다가
온몸이 활활 타오르면서
풍덩 빠져들고 싶은 봄날이네 *

 

* 홍매화 짙던 날 - 원성  

하늘빛이 나무에 걸려 웃고 있는데

먼 길가에선 새싹들이 손짓하는데

하나하나 떨어지는 꽃잎은

서글픈 내 마음에 와 아련한 눈물 되네


내 눈에는 봄이 깊어만 가는데

고운님은 저만치 내달려가는데

흩날리는 꽃잎 땅 위에 피어

철없는 아지랑이 꽃길 따라 춤을 추네


하루가 또 하루가 저물어 가는데

지워야 할 엄마 얼굴 떠오르는데

나뭇가지엔 붉은 홍매화

아련한 기억들이 망울져 울고 있네


아무리 말을 건네보아도

아무리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스님은 아무 말씀 없으시네

에타는 내 마음을 아무도 모른다네


홍매화빛 저리도 짙어 가는데...

 

* 묵은 등걸에 핀 매화꽃 아래 - 이준관

묵은 등걸에 핀 매화꽃 아래
외진 집 한채 짓겠네

책 한 권 펼치면 꽉 차는
토담집 한 채 짓겠네

밤이면 매화꽃으로 불을 밝히고
산(山) 달은 산창(山窓)에 와서

내 어깨 너머로 고시(古詩)를 읊으리 *

 

* 매화, 흰빛들 - 전동균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
* 전동균시집[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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