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일근 시 모음 2

효림♡ 2011. 1. 31. 08:34

* 은현리 홀아비바람꽃 - 정일근    

산다는 것은 버리는 일이다

 

내 심장 꺼내고 그 자리에 채워 넣었던

첫사랑 했으나, 그해 가을

진해 바다로 투신하고 싶었던

어린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까지

추억에서 꺼내 내버린 지 오래다

 

詩에 목숨 걸었으나, 당선을 알려주던 노란 전보

첫 청탁서, 첫 지면, 첫 팬레터...詩로 하여 내 전부를 뛰게 했던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가슴 설레며 읽은 신간 서적 책장에 꽂아둔 채

표지가 낡기도 전에 잊히듯이

산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다

 

만남보다 이별이 익숙한 나이가 되면

전화번호 잊어버리고 주소 잊어버리고

사람 잊어버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두

주머니 뒤집어 탈탈 털어 잊어버린다

 

행여 당신이 남긴 사랑의 나머지를

내가 애틋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검산이 틀렸다

 

솔발산 깊은 산길에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잎 버리고 꽃잎 버리고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나도 홀로 피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인생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부터 편안하다

편안해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 좋다

 

다시 바람 불지 않아도 좋다

혼자 왔으니 혼자 돌아갈 뿐이다 *

 

* 자연(自然) 받아쓰기 

더 이상 예언자들을 믿지 않는 神은
자신의 말씀 사람의 귀에 들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예언은 오독(汚瀆)되었으며
오독(誤讀)의 예언은 방언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 神은 자연에만 자신의 말을 남긴다
사람이 만든 도시에 나가 설교하지 않으며
자신이 만들었던 시골에 남아 전원생활을 즐긴다
감나무 새잎들이 햇살로 세수하고 나와
눈부신 神의 말씀 전하는 아침부터
무논에 개구리 왁자그르르 울어
神이 묵상에 잠기는 저녁까지
나는 이제 막 글을 배운 초등학교 1학년처럼
연필 끝에 침을 발라 열심히 받아쓰고 있다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에 남기는 神의 말을 *
 
 

* 어머니 날 낳으시고 
오줌 마려워 잠 깼는데 아버지 어머니 열심히 사랑 나누고 계신다, 나는 큰 죄 지은 것처럼 가슴이 뛰고 쿵쾅쿵쾅 피가 끓어 벽으로 돌아누워 쿨쿨 잠든 척한다, 태어나 나의 첫 거짓말은 깊이 잠든 것처럼 들숨 날숨 고른 숨소리 유지하는 것, 하지만 오줌 마려워 빳빳해진 일곱 살 미운 내 고추 감출 수가 없다.

어머니 내가 잠 깬 것 처음부터 알고 계신다, 사랑이 끝나고 밤꽃내음 나는 어머니 내 고추 꺼내 요강에 오줌 누인다, 나는 귀찮은 듯 잠투정을 부린다, 태어나 나의 첫 연기는 잠자다 깨어난 것처럼 잠투정 부리는 것, 하지만 어머니 다 아신다, 어머니 몸에서 내 몸 만들어졌으니 어머니 부엌살림처럼 내 몸 낱낱이 다 알고 계신다. *

 

*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륵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 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

 

* 신문지 밥상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궁시렁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 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말씀 철학 *

 

* 연애사진 한 장  
춘도에 동백이 활짝 피는 날
첫사랑 순이와 꽃구경 가는 날
새하얀 백 나팔바지에 진노랑 남방 받쳐 입고
바지 뒤에 도끼빗 슬쩍 감취 꽂고
장발머리 봄바람에 휘날리며 소풍 가는 날
동백꽃 닮은 순이는
땡땡이 원피스에 굽 높은 뾰족구두
손에 든 도시락엔 김밥과
새로 나온 별표 사이다 한 병
이제 배우기 시작한 기타를 어깨에 메었지만
어떤 노래로 사랑을 고백할까
아버지 어머니 사진첩에
연애할 때 찍은 사진 한 장
명함 크기만 한 사진 뒷장엔
춘도 가는 배라고 적혀 있는
최고로 멋을 내며 박은
흑백 연애사진 한 장

 

* 종

종이 울리는 것은
제 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이목구비를 모두 잃고도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그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커다란 소리의 몸이 구르고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 *

 

* 가을의 일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黃道)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채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놓아야겠고
가을별들 제자리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보는 것이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詩)를 읽으며 조금씩 조금씪 쓸쓸해질 것이니
시(詩) 읽는 소리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는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

 

* 그 후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고

벽으로 놓던 흰머리 창가로 두고 잔다

밤새 은현리 바람에 유리창 덜컹거리지만

나는 그 소리가 있어 잠들고

그 소리에 잠깬다, 빈 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 소리 들을 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 내가
내 손목 긋는 악몽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 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

 

* 착한 詩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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