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지하 시 모음

효림♡ 2011. 2. 18. 22:52

* 솔잎 - 김지하   

엄동에도

솔잎은 얼지 않고

나무들은

뿌리만으로 겨울을 견딘다

모두 오염되고

파괴되었어도

생명은 얼지 않고

뿌리에서 오는 힘으로

넉넉히

새봄을 준비한다 *

* 김지하시집[花開]-실천문학사

 

* 동짓날  

첫봄 잉태하는 동짓날 자시
거칠게 흩어지는 육신 속에서
샘물 소리 들려라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샘물 소리 들려라
한 가지 희망에
팔만사천 가지 괴로움 걸고
지금도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날 뿐
아무것도 없고
샘물 흐르는 소리만
귀 기울여 귀 기울여 들려라 *
 

 

* 줄탁(啐啄)

저녁 몸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 

 

* 새   

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 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 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둥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 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 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눈부신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

 

* 사랑 

꽃 피어도
나비
오지 않는다//
봄의 적막이
속에 든다//
춥고
외로와
사랑하고저 하나
내밀어 볼

없다//
온 마음
맨몸이 죽도록
거리를 걷는다
피투성이로 걷는다
사랑하고저 *

 

* 無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시장해서

너를 사랑했노라

 

땅위의 풀과 벌레

거리의 이웃들

해와 달 별과 구름 모두 다

모두 다 죽어가는 이 한낮

 

내 속에

텅빈 속에

바람처럼 움트는

웬 첫사랑 우주사랑

그 새 뿔음을

본다

공허하므로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

 

* 빈 가지 

빈 가지

꽃샘에 흔들릴 때//

빈 가지

꽃눈 튼다//

매연의 거리에 내리는

봄눈//

천지의 향기//

술 한잔 마련 없는

내 삶에 한 줄기

물 오르는 소리//

사랑 움트는 소리//

이 봄엔

우주 안에서

우주 만나라//

떠나라 *

 

* 봄 살이 

눈부시게 흰

목련 앞에서

시커먼 욕정이 샘솟는 것은

들판으로 놓여난

봄살이 때문

 

부서지고 더렵혀지고
깨어져 나가는 지구가
아프다 외칠수록 외칠수록
꽃들 저리도
시리게 아름다운건
죽으며 살아나는
봄살이 때문

거리를 휩쓰는 시위물결속에서
혼자 외롭고 혼자 어리석고
집안에 앉아 침묵하면
속에서 우주가 가없이 자라는것
겨울과 여름사이
봄살이 때문

 

사랑할수록

너와 나 사이 물이 흘러

멀리서 맞절하느니

서로 고맙다 맞절하느니

아아

이 모든 것

봄살이 때문 *

 

* 공경 

미루나무 위는

하늘

하늘 끝은

미루나무//

높은 데 올라서야

산 높은 것을 아는 법//

내 가슴이여

여인을 보고

어린이 앞에

뛰어라

가슴이여//

우주의 싹이

사방에 산다//

사랑은

공경//

높여야 흐르는 법 *

 

* 절, 그 언저리   

절 

그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達摩 안에//

寒梅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風蘭 곁에도 

있다//

맨끝엔 반드시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풋
숨어 있다//
깊숙이
빛 우러러 절하며 *

 

* 꽃 禪院 

추사가 썼다는

世界日花 祖宗六葉

낮은 문 좌우에


영산홍 한 그루

자산홍 또 한 그루

선원 마당에 맞절하네


내 왼쪽 분홍빛 뺨과

네 오른쪽 자줏빛 볼이


서로 웃음지어

맞부비어

山紅參禪 내리 하는 곳


육백년 古梅와

곁에 선 매화자손들 줄줄이

寒梅參禪하는 그 자리


호남 제일

꽃 선원


미소

꽃드는

자리  


오오

花史여

 

* 无量壽閣 앞에서 

늙은 院堂의

무량수각 현판 뒤 

맞배 팔작 앞//

붉디 붉은 석류 두 그루//

옛 신라에 섰고 

옛 고려에 섰고 

옛 조선에 섰고//

그 혹독하던 

일제에도 우뚝 섰더니//

오늘 

시들려는가//

살되 

살아 죽는 것 

죽되 

죽어 사는 것 *

 

* 白鶴峯 1 

멀리서 보는 

白鶴峯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

 

* 白鶴峯 2 

지금 여기

白羊寺에 와 있다

험했던 시간과 험했던 산천에

험했던 험했던

투쟁의 스님

知詵禪師  

큰 아픔으로 주석하는 곳

佛龕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한마리 白羊의 흰 그늘에

공명하는 칼끝 바람소리

귀기울이며 마주앉아

차를 마신다 - 백학봉 2 中에서 

 

*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 목련

눈을 뜨면 시커먼 나무등걸
죽음 함께 눈 감으면
눈부신 목련
내 몸 어딘가에서 아련히
새살 돋아오는 아픔
눈부신 눈부신 저 목련. *

 

* 화개(花開)  

부연이 알매 보고

어서 오십시오 하거라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말아라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봉오리 살풋 열리듯

 

아아

"花開!" * 

 

*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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