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지리산 시 모음

효림♡ 2011. 3. 10. 12:45

* 지리산 - 이성부 

가까이 갈수록 자꾸 내빼버리는 산이어서

아예 서울 변두리 내 방과

내 마음 속 깊은 고향에

지리산을 옮겨다 모셔 놓았다 

날마다 오르내리고 밤마다 취해서 

꿈속에서도 눈구덩이에 묻혀 허위적거림이여 *

 

* 지리산 - 김지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이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

 

* 벽소령 내음 - 이성부 

이 넓은 고개에서는 저절로 퍼질러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부침개 한 장 사먹고

남족 아래 골짜기 내려다본다

그 사람 내음이 뭉클 올라온다

가슴 뜨거운 젊음을 이끌었던

그 사람의 내음

쫓기며 부대끼며 외로웠던 사람이

이 등성이를 넘나들어 빗점골

죽음과 맞닥뜨려 쓰러져서

그가 입맞추던 그 풀내음이 올라온다

덕평봉 형제봉 세석고원

벽소령 고개까지

온통 그 사람의 내음 철쭉으로 벙글어

견디고 이울다가

내 이토록 숨막힌 사랑 땅에 떨어짐이

사람은 누구나 다 사라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떨어지지만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 아름답구나!

그 사람 가던 길 내음 맡으며

나 또한 가는 길 힘이 붙는다 *

 

* 가는 길 모두가 청학동이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27 - 이성부   

청학동이라는 데가 정말 이곳인지
저 건너 등성이 너머 악양골인지
최고운(崔孤雲)이 사라진 뒤 청학 한 마리
맴돌다 가버렸다는 불일폭포 언저리인지
피밭골 계곡인지 세석고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옛 사람들이 점지해놓은 청학동 저마다 달라도
내가 걸어 찾아가는 곳마다 숨어살 만한 곳
그러므로 모두 청학동이다

혼자 가는 산길
거치적거리는 것 없어 편안하고
외로움은 따라와서 나를 더욱 살갑게 한다
내 눈에 뛰어드는 우리나라

안개 걷힌 산골짜기 모두 청학동이어서

발길 머물고 그냥 살고 싶어라

 

* 천왕봉 일출에 물이 들어 -내가 걷는 백두대간 14 - 이성부 

캄캄한 칼바람 속 바위 등걸에 앉아
얼어붙은 털모자 땀고드름을 털어낸다
사람 사는 일 오고가다
더러는 모진 사연 만나는 줄이야 이미 알았거늘
새로 또 닥치는 매서운 추위
아무래도 삶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저만치서 내빼는 것 뒤쫓기만 하다가
넘어져서 덜덜 떨고 있는 일 아니더냐
손발은 카니와 코도 귓볼도 내 것 아닌 것 같아
바람막이 바위 아래로 몸을 낮춘다
한결 고즈넉하다
내 여기 이르러 움츠려 있음은
내 여기 이토록 힘겹게 또는 씩씩하게
험한 길 찾아 올라와서 그대 기다리는 일
길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 사랑 맞이하는 일
온 천하 산지사방 어둠 속에서
문득 동쪽 하늘 어슴푸레 긴 가로 금
마침내 한점 붉디붉은 것 틔어 빛나더니
큰 덩어리로 떠올라
내 온몸 달아오름이여 
 

* 카니와-물론이려니와,라는 뜻을 지닌 옛말

 

* 지리산 감나무 - 허수경 

늦가을 바람녘

비 맞은 감이 지네

남정들 썩은 삭신을 덮고

허옇게 허옇게 지리산 청마루도 흐려지는데

 

지리산 감나무 맨 윗가지

무신 날이 저리 붉은가

얼어붙은 하늘에 꽉 백혀 진저리치고 있는가

 

된똥 누다 누다

눈꼬리에 마른 눈물 달은 자식들처럼

감씨 퉤퉤 뱉다 기러기떼

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남정들처럼

 

잘못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한반도 근대사 속을

사람 지나간 자취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감꽃 폭풍 *

 

* 지리산에 가면 있다 -둘레길 - 박남준 

순한 애벌레처럼 가는 길이 있다

땀 흐르던 그 길의 저기쯤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는

오래 묵은 당산나무 귀신들이 수천 천수

관음의 손을 흔들며 맞이해서

오싹 소름이 서늘한 길이 있다

 

두리번두리번 둘레둘레

한눈을 팔며 가야만 맛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

더운 여름날 쫓기듯 잰 걸음을 놓는 눈앞에는
대낮에도 백년여우가 홀딱홀딱 재주를 넘으며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무시무시한 길이 있다.

서어나무 숲이, 팽이나무 숲이, 소나무 숲이
서걱서걱 시누대 숲이 새파랗게 날을 벼리고는

데끼 놈, 게 섯거랏 싹뚝,

세상의 시름을 단칼에 베어내고

도란도란 낮은 산길이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산골마을들이 풀어놓은 정겨운 사진첩

 

퐁퐁퐁 샘물에 목을 축이며 가는 길이 있다

막걸리 한 두잔의 인심이 낯선 걸음을 붙드는 길이 있다

높은 산을 돌아 개울을 따라 산과 들을 잇고

너와 나 , 비로소 푸른 강물로 흐르고 흐르는

아직 눈매 선한 논과 밭, 사람의 마을을 건너는 길이 있다

* 박남준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 물봉선의 고백 - 이원규 

내 이름은 물봉선입니다

그대가 칠선계곡의 소슬바람으로 다가오면

나는야 버선발, 버선발의 물봉선

 

그대가 백무동의 산안개로 내리면

나는야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실상사의 새벽예불 소리로 오면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나는야 잽싸게 꽃씨를 퍼뜨리며

차라리 동반 자살을 꿈꾸는 독초 아닌 독초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비들이 날아와 잠시 어우르고 가듯이

휘파람이나 불며 그냥 가세요 

 

행여 그대가

딴 마음을 먹을까봐

댐의 이름으로 올까봐

내가 먼저

손톱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맹세를 합니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

 

* 구례사람들 눈빛은 - 김인호 

지리산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는

구례에 와서 밤하늘 바라보면

구례에는 별이 두 개 더 있다

 

마을 가까이 내려서고 싶은 모양으로

시암재와 노고단에서 빛나는 두 별

 

그 하나의 별빛은

산으로 쫓겨가야 했던 사람들의 맑은 눈빛이고

또 하나의 별빛은

돌아오지 못하고 잠든 사람들의 깊은 눈빛이다

 

그 두 별을 가슴에 품어서일까

 

구례사람들 눈빛은

유난히 맑고 깊은 그 별빛을 닮아있다

 

* 실상사의 돌장승 -지리산에서 - 신경림 
지리산 산자락

허름한 빈박집에서 한 나달 묵는 동안
나는 실상사의
돌장승과 동무가 되었다 
그는 하늘에 날아 올라가
노래의 별을 따다주기도 하고
물속에 속꽂이해 들어가
애기의 조약돌을 주워다주기도 했다 

헐렁한 벙거지에 퉁방울눈을 하고
삼십 년 전에 죽은
내 삼촌과 짝이 되어
덧뵈기춤을 추기도 했다 

여름 산이 시늉으로 다리를 떨며
자벌레처럼 몸을 틀기도 했다 

왜 나는 몰랐을까
그가 누구인가를 몰랐을까 
문득 깨닫고 잠에서 깨어나 달려가 보니
실상사 그 돌장승이 섰던 자리에는
삼촌과 그의 친구들만이
퉁방울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서서
지리산 온 산에 깔린 열나흘 달빛에
노래와 얘기의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

 

* 나무 1 -지리산에서 -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

* 신경림시집[길]-창비

 

* 지리산 시 -달 - 문효치   
화개재 위에 솟은 달은
혼자 보기로 했다 

초로의 내 가슴을
아직도 충분히 울렁거리게 하는
예쁜 여인 배시시 웃는 모습이어서

근택이도 남일이도
텐트 속으로 등밀어 들여보내고

숲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혼자만 가만히 안아 보았다

 

* 허리안개 - 허형만

지리산중턱을 에둘러 싼

저 안개 속으로

새 한 마리 빨려 들어간다

빈 하늘에

호르르 호르르

바람칼 나르던 소리만

물빛처럼 반짝인다

내 생애의

한 줄기 자드락길도

저 허리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

참 이윽하다 *

 

* 써레봉을 넘어서 - 강영환
그대 흥미 없는 생에 무너지고 싶다면
흔적도 없이 무너져 훨훨 날아가고 싶다면
남도 지리산 동녘 써레봉으로 가서
세상을 가르는 칼등을 걸어 보라
눈이 상봉을 향하여 갈증을 풀 때 산등은
눈부신 쪽으로 몸을 끌어가려 하느니
왼쪽은 가물가물 햇살 벼랑이고
오른쪽은 푸르고 깊은 수해 빛이다
그곳에는 영원에 쉽게 닿는 길이 숨어 있다
한번 무너지면 돌아올 수 없는 길 위에서
몸은 스스로 균형을 잡고 가지만
눈에 넣고 가는 상봉이 앞서서
지친 영혼을 손잡고 길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몸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그때 써레봉 가듯 이승을 걸어라

* 철죽祭 - 고정희 
산마을 사람들아
고향땅 천리 밖에 있어도
철쭉 핀 노을강 앙금이 보인다
아름답게 갈라진 노을강 허리
하늘마저 삼켜버린 노을강 강바닥
지리산 철쭉밭에 꽃비로 내리고
즈믄밤 내린 꽃비 꽃불로 타오르고

*철죽제中 1연

 

* 지리산 오솔길 - 이태수  

지리산 고즈넉한 자락에 들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희미해지는 낮달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멧새들의 낮고 따스한 지저귐

 

자꾸만 물러서는 길 더듬어 떠돌던

내 발자국들이 빚어놓은

 

저 희미한 포물선. 그 너머로

하염없이 가는 몇 점 조각구름

 

무심한 바람 소리

흔들리는 나뭇잎, 나뭇잎들

 

작아지고 작아지다 가까스로 만난

산속의 작은 길 하나

 

마음 비우고 길 다 버리고서야

가르마처럼 열리는 숲 속 길

 

햇살 뛰어내리며 되비추는

우리의 저 오솔길 한 줄기  

* 이태수시집[회화나무 그늘]-문학과지성사

 

* 겨울 산에서 -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 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 德山卜居 - 曺植 

春山底處無芳草 - 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 - 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 - 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猶餘 - 은하십리끽유여

- 덕산에 묻혀산다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옥황상제가 사는 곳(帝居)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

*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 題德山溪亭柱 - 曺植  

請看千石鍾 - 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 - 비대고무성

爭似頭流山 - 쟁사두류산

天鳴猶不鳴 - 천명유불명

- 덕산 계정 기둥에 새긴 글  

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오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하겠소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

*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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