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근배 시 모음

효림♡ 2011. 3. 17. 10:09

* 살다가 보면 - 이근배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

* 이근배시집[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문학세계사


* 금강산   

산이 사람인 거

사람이 산인 거   

한번은 뱃길이 처음 열렸대서, 또 한 번은 반세기 까딱 않던 휴전선 쇠울타리가 끊기고 뭍으로 길이

렸대서, 그렇게 두 번 금강산엘 갔다. 돌 , 물, 구름, 나무야 윗대 묵객들 죄다 쓰고 죄다 그렸으니

더 보탤 것 어디 남겼으랴, 살아 밟을 줄 몰랐던 길

나는 듯 오르니 산은 간데 없고 여기 불쑥 저기 불쑥 내미는 얼굴들, 아하 먼저 가신 할머니, 할아버

들 예서 사시는구나, 북 치고 장구 치고 날마다 잔칫날이구나  

이제 알겠네, 사람들이 금강산에 와서

왜 모두 돌이 되고 물이 되는가를 *

 

* 내가 왜 산을 노래하는가에 대하여

목숨을 끊은 양 누워 슬픔을 새김질해도
내 귀엔 피 닳는 소리 살 삭이는 소리
산, 너는 죽어서 사는 너무도 큰 목숨이다.

그 황토흙 무덤을 파고 슬픔을 매장하고 싶다
다시는 울지 않게 천의 현(絃)을 다 울리고 싶다
풀 나무 그것들에게도 울음일랑 앗고 싶다.

어느 비바람이 와서 또 너를 흔드는가
뿌리치려 해도 누더기처럼 덮여오는 세월
깊은 밤 가위눌린 듯이 산은 외치지도 못한다. *

 

* 골동가 산책

목 잘린 병에 갇혀 날지 못하는 한 마리 학 

그 조선왕조의 울음 끼룩끼룩 울고 있다

그렇지 또한번 바스라져도 목청이야 살을 테지

 

나이가 들수록 새살 돋는 청화백자

어둠을 씻고 나면 말갛게 뜨는 하늘

역사는 금이 갈수록 값을 되려 더 받는다 *

 

* 억새

내가 사랑하는 것 죄다/아파하는 것 죄다/슬퍼하는 것 죄다/바람인 것 죄다/
강물인 것 죄다/노을인 것 죄다/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 죄다/죄다 죄다 죄다//

는 버리고 있구나//

흰 머리 물들일 줄도 모르고/빈 하늘만 이고 서 있구나//

돌아가는 길/내다보고 있구나 *

 

* 부작란(不作蘭) -벼루에게 

다시 대정(大靜)에 가서 추사를 배우고 싶다
아홉 해 유배살이 벼루를 바닥내던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그 먹빛에 젖고 싶다

획 하나 읽는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
세한도(歲寒圖) 지지 않는 슬픔 그도 새겨 헤아리며

시간도 스무 해쯤 파지(破紙)를 내다보면
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 찾아질까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까 *

 

* 절필(絶筆)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들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 간찰(簡札)

먹 냄새 마르지 않는

간찰 한쪽 쓰고 싶다//

자획(字劃)이 틀어지고

글귀마저 어둑해도//

속뜻은 뿌리로 뻗어

물소리에 귀를 여는.//

책갈피에 좀 먹히다

어느 밝은 눈에 띄어//

허튼 붓장난이라

콧바람을 쐴지라도//

목숨의 불티같은 것

한자라도 적고 싶다. *

 

* 찔레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

네게 던지마 피 걸레에 싸서

희디흰 입맞춤으로 주마

내 어찌 잊었겠느냐

가시덤불에  펼쳐진 알몸

사금파리에 찔리며 너를 꺾던

새순 돋는 가시 껍질 째 씹던

나의 달디단 전율을

스무 해전쯤의 헛구역질을 *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비채

 

*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어느 날 문득
서울 사람들의 저자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보았을 때
산이 내 곁에 없는 것을 알았다
낮도깨비같이 덜그럭거리며
쓰레기더미를 뒤적이며
사랑 따위를 팔고 있는 동안
산이 떠나버린 것을 몰랐다
내가 술을 마시면
같이 비틀거리고
내가 누우면 따라서 눕던
늘 내가 되어 주던
산을 나는 잃어버렸다
내가 들르는 술집 어디
만나던 여자의 살냄새 어디
두리번거리고 찾아도
산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산이 가버린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

* 이근배시집[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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