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 박남준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 일도 어쩌면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지
후두둑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
진다 덧없다 덧없이 진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다
모진 바람 불고 비
밤비 내리는지 처마끝 낫숫물 소리
잎 진 저문 날의 가을 숲 같다
여전하다 세상은
이 산중, 아침이면 봄비를 맞은 꽃들 한창이겠다
하릴없다
지는 줄 알면서도 꽃들 피어난다
어쩌랴, 목숨 지기 전엔 이 지상에서 기다려야 할
그리움 남아 있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너에게, 쓴다 *
* 눈길
그 눈길을 걸어 아주 떠나간 사람이 있었다
눈 녹은 발자국마다 마른 풀잎들 머리 풀고 쓰러져
한쪽으로만 오직 한편으로만 젖어가던 날이 있었다 *
* 이래도 안 오시겠어요
아른아른 아지랭이가 먼 산들에 피어오르는 이 봄날 겨우내 묵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들녘에 가보아요. 양지쪽마다 새순 곱게 피어올리는 냉이며 달래 씀바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을 하듯 조심스레 캐어 맑은 개울물에 씻고 갖은 양념을 넣었습니다. 한 그릇의 봄나물을 버무릴 때마다 손끝에 피어나는 상큼한 봄의 냄새, 아! 생명의 소중함, 푸른 대지의 고마움을 알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삶의 한편에 놓일 상큼한 한 그릇의 봄나물이 되려 합니다. 그 봄나물을 키우는 푸른 대지. 그것이 바로 당신의 힘이라는 점, 아시는지요. 이렇게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 기다림이 지는 밤
눈을 감았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첫 만남에서가 아닙니다
당신과의 이별이
첫 이별이어서도 아니고요
빈 방에 눅눅한 적막이 흐르고
꿈도 없이 무릎 꿇었습니다
이제는 잊자고 잊었었지요
무너지며 무너지며 어깨를 들먹였었지요
산숲 가득 바람 불고
눈물 같은 비 젖어오는데
뚝 뚝 감꽃이 지는 밤
멀리 호랑지빠귀 소리가
아득해져갔습니다
이제 사위어질지요
타고 남은 재로 다 타고 남은 재로 *
* 저문 외길에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가는 것
그는 모르는지
길 끝까지 간다
가는데 갔는데
기다려본 사람만이 그 그리움을 안다
무너져내려본 사람만이 이 절망을 안다
저문 외길에서 사내가 운다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 *
*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
고추밭에 고춧대들이 다 쓰러졌다
홀로 비바람 견디기에 힘들었던가
아니라면 그 어떤 전율 같은 격한 분노에
몸을 온통 내던졌는가
내 기억의 뒤란에 쓰러져 누운 것들이 있지
오래 묵었으나 삭지 않아 눈에 밟히는 것들이 있지
작년 여름 쓰러져 죽은
미루나무 가지들 잘라 지주대로 삼는다
껴안는구나
상처가 상처를 돌보는구나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 엮이며 세워져
한 몸으로 일어선다
그렇지 그렇지
푸른 바람이 잎새들을 어루만지는구나
* 박남준시집 [적막]-창비
관덕정에서부터 걸었네
명월지나 애월바다 마라도며 다랑쉬오름
그대를 만나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고
바람과 돌, 오름의 전설이 숨 쉬는 땅
내 눈 모자라 다 보고 또 못 보네
유년의 기억을 부르는 바람개비의 풍차가
가던 발길을 설레게 하며 멈추게도 했네
개발로 파헤쳐진 아름다운 곶자왈도 보았네
유채꽃 흔들리는 노란 꽃 그늘 아래 쓰러지던
할머니와 어머니와 어린 누이의 넋들이 손짓하기도 했네
붉은 철쭉꽃 아래 으깨어진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내 형제들의 비명이 들려오기도 했네
쓰러진 것들이 일어나 함께 걷는 나 여기 제주에 왔네
그대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
바로 내 안의 생명과 평화를 얻기 위한 일
내 안으로 걸어가네
바람과 돌들의 말에 귀 기울이네 내 귀는 자꾸 가물거리는데
제주의 모든 바람과 돌들이
생명과 평화의 말로 노래 부를 때까지
걷고 또 걷겠네 그대에게 가는 길 멈추지 않겠네 *
* 산
가지 않아도 너는 있고
부르지 않아도 너는 있다
그리움이라면 세상의 그리움 네게 보낸다
기다림이라면 세상의 기다림
나에게 남았다
너는 오지 않고 너는 보이지 않고
꿈마다 산맥으로 뻗어
두 팔 벌려 달려오는 달려오는
너를 그린다 *
* 흰 종이배 접어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흰 종이배 접어 띄우면
당신의 그 바다에 닿을까요
먼 바람결로도 꿈결로도 오지 않는
아득한 당신의 바다에 닿을까요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백날 삼백예순닷날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바람 같은 당신께로 가는 사랑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
* 단속사지 정당매
봄날이었네
두고 벼르던 산청 단속사지 정당매 찾는 길
백석의 정한 갈매나무를 그려보던
두 눈 가득 기다리던 설렘이 내게도 있었네
거기 매화 한 그루
한 세월 홀로 향기롭던 꽃그늘은 옛 시절의 풍경이었는가
두 탑만이 남아 있는 단속사지
텅 빈 그 꽃잎들
저 탑 위에도 꽃 사태는 일어 바람을 불러 모았으리
늙고 꺾인 수령 610년
잔설같은 뼈만 남은 정당매여
네 앞에 서서 옛날을 기억해주랴 이름을 불러주랴
무상한 것들 어찌 사람의 일뿐일까
산중에 홀로 누웠네
별이 뜨기도 했네 별이 지기도 했네 *
* 박남준시집 [적막]-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