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홍신선 시 모음

효림♡ 2011. 4. 30. 15:30

* 겨울 - 홍신선   

언덕 너머 개울에서 헤어지는구나

겨울이여

그 동안 이 촌락에 와서

한가한 적막이 되어 그 큰 덩치로

떠 있던 겨울이여

떠서는 잡념도 내게 보내주고

잡소리도 세상에서 움켜다가

저 산곡에 쥐어주더니

오늘은 떠나는가

한동안의 정의(情誼)도 다 작파하고

개울에 와서 훌훌이 헤어지는가 *

 

* 사람이 사람에게  
2월의 덕소(德沼)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는 걸.
입 닥치고 강 가운데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

 

* 마음經 1 

올 겨울 제일 춥다는 소한小寒날

남수원 인적 끊긴 밭구렁쯤

마음을 끌고 내려가

항복받든가

아니면

내가 드디어 만신창이로 뻗든가

몸 밖으로 어느 틈에 번개처럼 줄행랑치는

그림자 *

 

* 마음經 55 

첩첩이 모여 놀던 저녁구름들 뿔뿔이 흩어져 제 집 돌아간다 

성근 빗 낱에 씻긴 

먼 산 뒤통수 

환한 쪽빛 속에 둥글둥글 돌출했구나 

 

마음 밖인가 마음 안인가 

내 가고 난 뒤 어느 때 역시 저와 같으리 *

 

* 누가 주인인가 

골동가게의 망가진 폐품 시계들 밖으로 

와르르 와르르 

쏟아져 나와 

지금은 제멋대로 가고 있는 

시간이여

 

그런 시간이 

인사동 뒷골목 깜깜하게 꺼진 얼굴의 

망주석(望柱石)에 모른 척 긴 외줄금 찌익 긋고 지나가거나 

마음이 목줄 꽉 매어 끌고 가는 

뇌졸중 사내의 나사 풀린 내연기관 속으로 

숨어들어 

재깍 재까닥 가다가 서다가 하는

 

이 느림이 삶의 주인이다 

우리의 정품이다 *

 

* 시골에 살리 

내 시골에 돌아가 살리

새로 핀 앵두꽃들로 세상을 환하게 갈아 입히는

또는 폐정속 아직도 깊은 밑바닥에서 울렁이는 관능들을

서리서리 또아리 튼 새벽 물빛들을 길으며

시골에 살리 *

 

* 봄날 

암나사의 터진 밑구멍 속으로

한 입씩 옴찔옴찔 무는 탱탱한 질 속으로

빈틈없이 삽입해 들어간

수나사의

성난 살 한 토막

 

폐품이 된 이앙기에서 쏟아져 나온

나사 한 쌍

외설한 체위 들킨 채 날흙 속에서 그대로 하고 있다

둘레에는

정액 쏟듯 흘린

제비꽃 몇 방울 *

 

* 달맞이꽃 
질까 말까
속으로 망설이는 달맞이꽃 망설이는 소리
또 그 옆에서
속으로 필까 말까 머뭇대는 달맞이꽃 머뭇대는 소리

망설이는 순간의 삶의 總體性
머뭇대는 순간의 立體性

밖으로 밖으로 모두 樂觀論만 쳐다보는
이 시대에
골똘히 내면을 무더듬고 섰는
고개 숙인 꽃의

목덜미


오늘 그 뿌연 목덜미에
남김없이 주어진
휘영청한
달밤! *

 

* 매화

뒷방 벽에 똥이나 척척 이겨 바르듯

제 몸 엉덩이나 바짓가랑이에

얼어터진 꽃 몇 방울

민망하게 묻히고 선

 

치의(緇衣·검은 승려복)마저 나달나달 해진 오 척 단구의

매화 등걸

그동안 몸으로 꽃 열더니

이제는 똥칠인 듯

항문으로 여는가

 

모처럼 아파트 담벼락에 해바라기하고 선

그에게서

이념의 마비에서 풀린 송장을 발견한다

가진 것 없을수록 사람이 얼마나 고강해지는가를 발견한다

 

머지않아 앞산들

물렁뼈 닳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앉기 시작하리라

응결된 내상들 화농해 쏟아져 나오듯

나날이 녹음들 쏟으리라 *

 

* 부도(浮屠) 
죽으면 어디 강진만 갈밭쯤에나 가서
육괴(肉塊)는 벗어서
시장한 갯지렁이 시궁쥐들의 뱃속에나
소문 없이 채워주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면
찬 뼈 두 낱 정도로 견디다가
언젠가는
그것도 다아
이름 없는 불개미떼나 미물들에게
툭툭 털어
벗어줄 일이지
쇠막대 울 앞
애꿎은 시누대들만 수척한 띠풀들 사이 끌려나와
새파랗게 여우눈 맞고 있다 *

 

* 나의 시 
왜 전신 마비 침대의 사내처럼 너는 늘 등밀이 등밀이로만 누워서 흐르는가
절벽에서 꼭 한번만은
어떡하긴
필생의 결단처럼 양손 가볍게 놓아버려라
수백 수십 길 곧추 떨어지다 일어서다 마침내 한 방 먹이거라
대명한 하늘땅 사이
먹먹한 목청 큰 사자후 한 방
귀청 장렬히 터진 뭇 회중들의 먹은 귀때기들도 쓸어버려라
죄다 묻어버려라

폭포여
시여 *

 

* 비유를 나무로 한 나의 노래는  

1. 한 마리 거미를 근원으로 하여 창유리에 하나의 흔적으로 움크렸던 꿈 조각이 입체의 얼굴로 깨어나는 아침 나의 전신은 햇볕들이 세우는 순금의 불길로 타오른다. 때로 그것이 이승에 듣[滴]는 내 목숨의 높이라면 나를 묶는 가로세로 교직마다에 낡은 풍금을 펴들어 자라온 뜻을 더듬어 노래하라.

 

2. 창유리를 닫으면 누런 벌레들로 굴러떨어지는 햇볕들. 사진틀 속에 끼워 꿈틀거리는 나를 비워내는데 더듬이로 나이를 헤집어가며 야망의 강물 바닥에 꽂힌 흔들리는 수초의 잎끝에 기포의 형태로 올라오는 많은 얼굴들 자꾸자꾸 잃었던 얼굴들을 건져올리는데, 아니 정수리에서 예감의 그물을 풀어내리는 바람들은 패각 위 나선형의 층계에 홈턱마다에 갇힌 바다를 일으키는데 아하
나는 보겠다. 바다들이 색색깔의 얼굴을 깨뜨릴 때 튀어오르는 물고기의 몸뚱이마다 선[立] 중량들을. 저것이었을까 이승에 떨구는 발소리마다에 머무는 내 무거운 뜻이 내 무거운 뜻이.

 

3. 철망 같은 빗금의 가지들을 뻗으며 거기 바람을 낀 많은 해들은 움칫거리고, 그러나 이미 제 몫의 조용한 몸짓으로 돌아가 지혜의 눈을 뜨는 내 언저리의 물상들, 나의 전신은 햇볕들이 세우는 황금의 불꽃에 주소를 둔다 . *

 

* 참회록

지나가거라, 나는 여기 아프지 않게 주저앉아 남으려 하느니

다만 늙고 병들었을 뿐이니

지나가거라 남은 시간들은

퇴역한 무용수처럼 한 벌씩 목숨 벗어던지며 자진하리니

아직도 손으로 더듬더듬 짚어가면 삭이지 못한 살피죽 밑 멍울선 죄(罪)들 만져지느니

지나가거라

언제 나를 던져 피투성이로 너인들 껴안고 뒹굴었느냐 폭발한 적 있느냐

안전선 뒤에 남 먼저 뒷걸음질로 물러서지 않았느냐 *

그렇다 잘 가거라

살아서 더는 만날 수 없는 마음의 덧없음에 살 떨릴 뿐

   

오, 말 탄 자

그대는 *

* 고 임영조의 시 중에서

* 홍신선시집[우연을 점 찍다]-문학과지성사
 
오래 전 종이로 燈 하나 만들어 
오래전에
저도
종이로
燈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보오야니 희던 등의 살결에
문득 먹빛 캄캄한
어둠이 와서
배어들고 있었습니다

불을 달려 보았습니다
안 보이는
그을음, 안 보이는 불꽃
살이 데이는
붙지 않는 불꽃을
동여 매어 놓았는데
캄캄한 등에선
가는 빛 하나
우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디에 달까
야윈 떨리는 손, 손가락으로
허공을 자꾸 헤집었습니다

사십팔대원 한 차례 달아놓은 등은
그 뒤 시나브로 흔들리다 없어졌습니다

없어져 어디에 있는가
이번엔
無量한 마음을 자꾸 헤집었습니다

없어진 어떤 등은
가난한 이의 가슴에 황금이 되어 박히고
울리고 고통받는 이
슬픔에 눈먼 사람 눈가로는
한 떨기 미소가 되어 타오르기도 하고

어느 등은 긴 강물에 잠기며 떠나가며
꺼질듯 살아오르며
시간 중의 형체도 없는
어딘가를
헤매이고 있었습니다

오늘 다시 초파일
한 채의 절에 와
등을 만나보니
안 보이던 백열의 불꽃은 뜨거웁고
캄캄하게 배었던
어둠은
새하야니 우리의 하늘빛으로
바래어
밝아 있습니다

 

* 늦여름 오후에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편에나 실려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나는 보았다, 방동사니풀과 전에 보지 못한 유출된 토사 사이로
새롭게 터져 흐르는 건수(乾水) 투명한 도랑줄기를.
지난 한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묻고는
천지팔황 망망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넘쳐흐르는
마음 위 깊이 팬 생각 한줄기 같은
물길이여
그렇게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
범람해 흐르는 개굴청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했으니
다만 느리게 팔월을 흐르는 나여
꼴깍꼴깍 먹은 물 토악질한
닭의장풀꽃이
냄새 기막힌 비누칠로 옥빛 알몸 내놓고 목물 끼얹는
이 풍경의 먼 뒤곁에는
두께 얇은 통판들로 초저녁 그늘 툭툭 쌓이는 소리.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우연을 점 찍다 
사창굴이 따로 있는가 아파트 단지 뒷길 화단에
때 늦은 쪽방만 한 매화들 몸 활짝 열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지 앵벌이 한 마리 절뚝절뚝 한쪽 발 끌며
꽃에서 꽃으로 방에서 방으로 점, 점, 점 찍듯 들렀다 날아간다
날아가다 또 들른다
무저갱 같은 꽃들의 보지 속에서
반출 금지된 자손이라도 비사입하는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도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모가지 한 번 내미는 것이
목숨 점지되는 인연이라는데
쪽방촌 성폭행범처럼 점점점 씨를 묻으며 드나드는 저 앵벌이 선택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매화들 뭇 가지에서 가건물처럼 철거된 빈 꽃자리
곧 거북이 모가지만 한 열매들 불쑥불쑥 내솟고
그즈음 앵벌이는 또 사창굴 여느 꽃의 곪아 터진몸 찾아다니며
가장자리 나달나달 핀 종이쪽지 구걸 사연이라도 돌리는가
이 꽃의 음호(陰戶) 속에 저 꽃의 치골 위에
점, 점, 점 우연을 점 찍는가
*[잡아함경]-맹구설화중에서
* 홍신선시집[우연을 점 찍다]-문지

 

* 홍신선(善)시인
-1944년 경기 화성 출생
-1965년 [시문학]등단 2006년 현대문학상,  2010년 김달진문학상 수상

- 시집 [황사바람 속에서][홍신선 시전집][우연을 점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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