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푸레나무에게 쓰는 편지 - 이상국
너의 이파리는 푸르다
피가 푸르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잎 뒤에 숨어 꽃은 오월에 피고
가지들은 올해도 바람에 흔들린다
같은 별의 물을 마시며
같은 햇빛 아래 사는데
네 몸은 푸르고
상처를 내고 바라보면
나는 온몸이 꽃이다
오월이 오고 또 오면
언젠가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날이 있겠지
그게 즐거워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 있는 힘을 다해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 마리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
* 시로 밥을 먹다
철원 사는 정춘근 형에게
시 한 편을 보냈더니
원고료 대신이라며 쌀을 보내왔다
그깟 몇푼 된다고
온라인 한 줄이면 충분할 텐데
자루에 넣고 다시 포장해서 택배로
이틀 만에 사람이 들고 왔다
철원평야 들바람과
농사꾼들 발자국 깊게 파인
논바닥이 훤히 보이고
두루미 울음까지 들어 있는
쌀을 보내왔다
나는 그걸로 식구들과 하얀 이밥을 해먹었다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300
* 자두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 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 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
* 별 만드는 나무들
설악산 수렴동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나무가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산에서 자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도 숲이 물결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
* 줄포에서
동해에서 조반을 먹고
줄포(茁浦)에 오니 아직 해가 남았다
나라라는 게 고작 이 정도라면
나도 왕이나 한번 해볼 걸
큰 영 하나만 넘어도
안 살아본 세상이 있고
해 질 때 눈물 나는 바다가 있는데
나는 너무 동쪽에서만 살았구나
해마다 패독산(敗毒散) 몇 첩으로 겨울을 넘기며
나 지금 너무 멀리 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래도 며칠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은 건
생의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아니라고 추운 날
기러기 같은 생애를 떠메고 날아온
부안 대숲 마을에서
되잖은 시 몇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만나는 여자도 없이 살았다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섰는데
변산반도 겨울바람이
병신같이 울지 말라고
물 묻은 손으로 뺨을 후려친다
나는 너무 일찍 서쪽으로 온 모양이다 *
* 선림원지(禪林院址)에 가서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경전(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武林)으로 돌아가네 *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 이상국시인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 신인상, 백석문학상, 유심작품상 수상
-시집[동해별곡][우리는 읍으로 간다][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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