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의자 시 모음

효림♡ 2011. 7. 1. 08:49

*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 이정록시집[의자]-문지

 

* 의자 - 김성용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로 외로워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 달라고 호소하지도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 발 달린 짐승이다 *

* 200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의자 위의 흰 눈 - 유홍준

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 먼 우주로부터 피곤한 눈 감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의 흰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 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 먼 곳에서 온 흰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 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 *

* 유홍준시집[나는,웃는다]-창비

 

* 한그루 의자 - 나희덕 
태어나서 한번도 두 발로 걸어보지 못했다
다리가 넷이라는 것이 불행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는 앉아 있다
그가 누구를 앉힐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을 누구보다 잘하기 때문,
그는 앉은 채 눕고 앉은 채 걷는다
혹은 앉은 채 훨훨 날고 있을 때도 있다
그를 오래 보고 있으면
조금씩 피가 식고 눈은 밝아져
그가 입을 열 때까지 하냥 기다릴 수도 있다
스물여섯 도막의 통나무가 한그루 의자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못에 찔려야 했는지,
그 굳어가는 팔다리 속에 잉잉거리는 게 무엇인지.
그러나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알 것만 같다
며칠 전부터 상처를 들락거리며
날벌레가 슬어놓고 간 알들을 깨우려고
햇빛은 자꾸만 그의 등뒤로 와서 내리쬐는 것이었다
한그루 나무에게 그렇게 하듯이

* 나희덕시집[어두워진다는 것]-창비

 

* 의자 - 김명인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 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

 

* 열두 개의 빈 의자 - 김수영 

가난뱅이 고흐는 의자를 열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번도 앉지 않은 팔걸이가 달린 의자들
파이프를 얹어둔 낡은 밀짚의자는
내 방 구석에 걸려 있다 

빵을 굶어가며 마련한 새 의자
그는 누구를 기다리며 의자를 비워 두었을까

한밤중 신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광부를 위해
어두컴컴한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농부를 위해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를 위해
창을 열듯 제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해바라기를 위해


그리고, 쪽창으로 들어오는 별빛을 바라보는
그 자신을 위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은 의자에 앉아
예수님의 열두 제자처럼 그를 에워싸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초대한 손님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의 쓸쓸함이 부른 손님들인 것이다

 

* 등받이 없는 의자 - 이승훈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세월이 300년이 넘는다 이제
난 지
쳤다 왜 아직도 소식이 없소? 문
지기에게 물어도 대답이 없
다 겨울
 저녁 해가 진다 눈이 내린다 문 앞
엔 작은 등불이 걸린다
난 문 앞에 
앉아 눈을 맞는다 등받이 없는 의
자에 앉아 문지기에게
다시 묻는다
 왜 아직도 소식이 없소? 그건 당신
이 바란 거야! 문지
기가 대답한다 
 문 앞에 앉아 300년이 흐른다 *

 

* 빈의자 - 문태준  

 걀쭉한 목을 늘어뜨리고 해바라기가 서 있는 아침이었다
그 곁 누가 갖다놓은 침묵인가 나무 의자가 앉아 있다
해바라기 얼굴에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박혀 있다
태양의 궤적을 좇던 해바라기의 눈빛이 제 뿌리 쪽을 향해 있다
나무 의자엔 길고 검은 적막이 이슬처럼 축축하다
공중에 얼비치는 야윈 빛의 얼굴
누구인가?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지그시 쓸어내린다
가을이었다
맨 처음 만난 가을이었다
함께 살자 했다 *

 

* 빈의자 - 나희덕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 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

 

* 긴 의자 - 장석남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오전엔 새가 한 마리 모퉁이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대다 간

새가 혼자 앉기에는 너무 큰 긴 의자

종일 햇빛만 앉아 있는

긴 의자

 

새가 그 맑은 눈으로 곰곰 궁금해했던 것이

이별에 대해서였다는 이별에 대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밤이 다 늦어서야 알고
다시 내다보는
긴 의자
  
오세요
앉았다 가세요
가끔은 누웠다가 가세요
얼룩 무늬 그늘도 가지고 와서 같이 있다 가세요
오세요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 낡은 의자 -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긴 나무의자 - 이하석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쓰러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 놓으면 의자는
제 깡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를 것처럼 쏟아져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앉아 있다

 

* 밤, 몰운대에서 - 채명석  

하루의 끝자락을 바라보고 싶다면

마음에 의자 하나를 놓고 그곳에 가보라

물컹물컹한 어둠에 입을 맞추고

사랑하듯 오랫동안 숨을 멈춰보라

켜켜이 쌓인 모랫뻘 울음과

질긴 목숨의 흔적 같은 뻘구멍

눈멀고 귀 먹고 입조차 문드러진 폐선처럼

울음바다에 몸을 띄워 노를 저어보라

등대처럼 슬픔은 길을 인도할 것이다

햇살이 어둠을 거둘 때까지

밀물처럼 찾아든 고요 속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빈 벤치에 앉아보라  

* 채명석시집[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문학의전당 

 

*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 정호승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속 깊이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모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스 잎새처럼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기를

더이상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도 높게 높게 가지를 뻗어

별들이 쉬어가는 숲이 되기를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기를  

 

나는 왜 당신의 가난한 의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의자에만 앉으려고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나는 왜 당신의 의자 한번 고쳐주지 못하고

부서진 의자를 다시 부수고 말았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

* 정호승시집[포옹]-창비

 

* 용서의 의자 - 정호승

나의 지구에는
용서의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하면 누구나
용서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절대 고독의 의자 하나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해질녘
어느 작은 별에 앉아 있던 의자도 아니고
법정 스님이 오대산 오두막에 홀로 살면서
손수 만드신 못생긴 나무의자도 아닌데
못이 툭 튀어나와 살짝 엉덩이를 들고 앉아야 하는
앉을 때마다 삐걱삐걱 눈물의 소리가 나는
작은 의자 하나
누군가가 만들어놓고
다른 별로 떠났다. *

* 정호승시집[밥값]-창비


* 식당의자 - 문인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 2007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

 

* 바닷가 벤치 - 정희성

마음이 만약 쓸쓸함을 구한다면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라

젊어 한때 너도 시인이었지

출렁이는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 위를 떠가는 흰 구름

그리고 바닷가 모래 위 작은 벤치에는

너보다 먼저 온 외로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

* 정희성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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