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 산가
어제 낮엔 양지 밭에 차나무 씨앗을 심고
오늘 밤엔 마당에 나가 별을 헤아렸다
해가 지기 전에 소나무 장작을 쪼개고
해 진 뒤 침침한 불빛 옆에서 시를 읽었다
산그늘 일찍 들고 겨울도 빨리 오는 이 골짝에
낮에도 찾는 이 없고 밤에도 산국화뿐이지만
매화나무도 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고요하였다 *
* 낡은 산사
벼랑에 장하게 솟은 느티나무를 끼고 돌자
다스름향 사르는 냄새가 싸아하게 번져왔다
들마루에 머윗잎과 곰취가 눅눅한 몸을
푸른 햇살에 맡기고 누워 있는 걸 보면
멀리 가시진 않은 것 같은데
스님은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이 골짜기 들어온 지 쉰네 해라 하면서도
아직 막내아들 걱정을 다 놓지 않은 스님은
속내의 바람에 약초밭을 매곤 했다
다디단 자두꽃 향기만 절 마당 가득하고
앞산엔 산벚나무 환하게 몸을 밝혔다
장끼가 깃을 치며 우짖는 소리에
산 그림자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다시 가을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
* 깊은 가을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비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
* 슬픔에게
* 빨래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머물던
비구름이 몸을 풀어 올라갔다가는 다시
산허리를 감싸안고 낮게 내려오길 이레째
선방 뒤를 돌아 개울물이 소리치며 흘러간다
먹물 묻은 손을 씻어낸 뒤
옷가지를 물에 담가 헹군다
동백꽃 붉은 꽃송이가 머리째 툭 떨어진다
아직 고운 자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꽃이
땟물과 섞여 떠내려간다
내가 지은 업이 물에 씻겨가길 바라며
비누칠을 하다가 아름답던 날들까지도
흘려보내야 함을 안다
선업도 업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자만과 욕심과 허영의 얼굴이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속옷을 빨아 다시 향기롭기를 바라기보다
선업도 악업도 햇빛에 다 날아간 뒤
그저 물 마른 냄새만 남길 바란다
다만 지워지고 씻기어 텅 빈 우주의 흔적이
거기 와 머문다면 좋겠다
나마저도 씻겨내려가
마음자리에 허공만 남는다면
고요히 비어 있는 충만 가운데
바람 소리 물소리 소리 없이 스민다면 *
* 밀물
모순투성이의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심심하였으리
그물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내 젊은 날은 개울 옆을 지날 때처럼
밋밋하였으리 무료하였으리
갯바닥 다 드러나도록 모조리 빼앗기고 나면
안간힘 다해 당기고 끌고와
다시 출렁이게 하는 날들이 없었다면
내 영혼은 늪처럼 서서히 부패해갔으리
고마운 모순의 날들이여
싸움과 번뇌의 시간이여 *
* 축복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 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 치며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
* 눈꽃
잔가지 솜털 하나까지 파르르 떨며
눈꽃을 피워들고 서 있는 달밤의 숲은
그대로가 은빛 빛나는 암유의 궁전입니다
보름 지나면서 달의 몸 한쪽이
녹아 없어진 이유를 알겠습니다
몸을 납처럼 녹여 이 숲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달빛에 찍어낸 듯 나무들이 반짝이며 서 있습니다
나무들은 저마다 한 개씩의 공안입니다
다보여래가 증명하는 화려한 은유의 몸짓입니다
체온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을 때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져나오고
깊고 외롭고 처절한 시간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적멸의 언어를 만나는 것입니다
생의 가장 헐벗은 시간을 견디는 자에게 내린
혹독한 시련을 찬란한 의상으로
바꾸어 입을 줄 아는 게 나무 말고 또 있으니
돌아가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돌아가는 동안 부디 침묵하고
돌아가 알게 되어도 겨울나무들의
소리 없는 배경으로 있어 달라고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